로마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자 장군이 하루 아침에 황제도 자신의 가족도 모두 잃고 노예가 된다. 여기에는 인생의 나락이 있고 추락이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인간, 그에게는 강인한 육신과 검 한 자루가 있을 뿐이다.
로마 제국의 빛나는 전성기를 이끈 오현제(Five good emperors)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리처드 해리스 역)'는 총애하는 심복이자 현명하고 용맹한 장군인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역)'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친아들인 '콤모두스(호아킨 피닉스 역)'는 아버지를 잇어 황제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 컴플렉스로 가득했던 심약했던 아들은 아버지를 질식시켜 죽이고 만다. 아버지를 제거했으니 이제 아버지가 총애했던 심복도 제거할 차례. 막시무스는 그렇게 모든 것을 단번에 잃는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썼다. "만약 누군가에게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부터 콤모두스의 등극 사이의 시기를 고를 것이다."
▲ 영화 <글래디에이터>포스터
콤모두스가 황제에 집권하면서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암흑기를 맞이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배경은 바로 그 역사적 시기에 배치되어 있다. 영화는 시대, 역사, 인물에 대한 정확한 고증보다는 로마 시대에 대한 판타지가 가미된 배경에 토대해 제국의 웅장함과 전투의 격정에 더욱 집중하며 극적 효과를 더한다.
검투사를 뜻하는 라틴어 '글라디아토르'에서 유래한 제목에 담겨 있듯 영화는 한 검투사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검투사인 한 인간이 죽기 직전까지 그의 모든 것을 걸고 혼신을 다해 단어 그대로 투사해야만 하는 장대한 운명전(戰). 그 모든 전장의 순간들과 고난을 극복해낸 이후 결국 사멸하는 운명을 향한 운명애(愛). 영화는 피로 얼룩진 인간의 폭정, 욕정, 복수의 서사로 흥건하다.
노예 검투사들이 목숨을 내놓고 검투를 벌였던 원형경기장은 사실, 황제의 공공연한 지배 도구였으며 귀족의 오락거리로 소비되던 장소였다.
로마 제국사(고대 말)의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켈리 교수는 그의 책 <로마 제국>에서 로마인들에게 있어 원형경기장이 지녔던 의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무엇을 하며 여가를 즐기는가? 이는 한 사회가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원형경기장은 관중과 극적인 경기들을 통해 질서와 폭력을 모두 구가하는 장소였다. 로마 사회와 황제의 권력이 만인에게 과시되는 장소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군사중심주의에 근거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평화로운 시대에도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는 장소였다. 북부 유럽의 장대한 중세 교회들처럼, 원형경기장은 로마 제국의 수많은 도시의 경관을 특징지었다. 군대, 세금, 법률, 행정과 마찬가지로 원형경기장은 제국의 속주에 눈에 보이는 질서를 부여하고 유지시키는 데서도 한몫했다.
원형경기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는 피로 얼룩진 정복의 역사를 손쉽게 재연하여, (이번에는) 큰 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를 통해, 군중은 제국 곳곳에서 사회계층에 따라 '편대'를 이루며 안락한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 영화 <글래디에이터> 스틸
로마인에게 그것은 스포츠였고, 소비 가능한 살육, 원정 체험의 도구였던 것이다. 살육의 광기에 가득 찬 황제의 통치 도구 속에서 민중은 폭력의 쾌감에 중독되어갔다. 그것은 죽음의 서커스였다.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짐승의 목숨처럼 치부되어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영웅은, 비참하고 절규하는 노예들의 무리 속에서 용맹하게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반란은 발각되고 실패한다. 공화정의 부활을 주장하며 죽어간 한 영웅의 용맹함. 그의 인내와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의 덕목. 그럼에도 결국 죽어가야만 하는 생명을 지닌 덧없는 인간.
결국, 역사에 실존했던 모든 영웅도 죽었고 그리스의 폴리스도, 로마 제국도 멸망했다. 불멸하는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은 사멸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원형경기장 같은 피비린내나는 삶 속에서 투쟁하며 살아간다. 단 한 순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일까.
한스 짐머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ost 중 대표적인 사운드트랙인 '나우 위 어 프리(Now We are free)'를 듣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황제 콤모두스 앞에서 막시무스는 투구를 벗고 냉정한 고요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관객들이 <글래디에이터>의 명대사로 기억하고 있는 이 네 줄 대사 속에 한 인간의 운명이, 영화 한 편이 다 들어 있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아우렐리아스 메레디우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태워죽인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비참한 생을 향해 칼끝을 겨누어야만 했던 인간 검투사에게 진정한 자유의 밀밭은 어디에 있었을까. 한 자루 칼을 편히 내려놓아도 되는 자유의 그곳. 그곳이 우리에게는 어디일까.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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