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알고 보니 이들은 서로 징글징글한 원수 가문의 자손들이었다. 그래도 이미 불붙은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남녀는 몰래 결혼식을 치룬다. 친척이 결투를 하다 죽는다. 잠시 이별한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강요받는다.
▲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여자가 가짜 독약을 먹고 죽은 척 잠이 든다. 도착해야 할 편지가 엇갈린다. 남자는 여자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따라 죽는다. 깨어난 여자가 죽은 남자를 보고 따라 죽는다. 아들딸을 잃은 징글징글한 원수 집안이 결국 화해한다.
이탈리아 베로나의 명문 귀족 가문인 몬테규가와 캐플릿가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사랑했던 이유는 이들이 원수 집안의 자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커플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이좋은 가문의 자손들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겠느냔 말이다.
심리학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Romeo & Juliet Effect)'라 부르는 이러한 현상은 흔히 부모들이 반대할수록 애정이나 반발 심리가 더욱 깊어지는 경우를 의미한다. 즉, 내 님 향한 내 사랑이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우리를 제발 사랑하게 내버려달라는 반발 심리, 인지 부조화로 외려 더욱 깊고 애절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 가족, 내 측근들마저 모두 반대하기 때문에 더욱 애가 타게 되는 사랑의 심리적 메커니즘.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보통 자신들의 고유한 결점들 때문에 파멸을 맞이한다. 치명적인 자기 자신의 결점 떄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 자신의 결점이 아닌 원수 가문에서 태어난 운명, 그 불가항력적인 결점 때문에 죽음이라는 파멸을 맞는다.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생긴 결점. 결국, 죽음으로 운명에 온몸으로 대항하는 것 말고는 도저히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젊음들의 벼락같은 사랑.
죽음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살려낸 이 무시무시한 용기와 열정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원한 청춘과 사랑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고들 사람들은 회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곧잘 낭만적 청춘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청춘의 사랑은 불안정한 일자리와 치솟는 집값, 과도한 삶의 비용들 때문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 플러스 알파를 포기하고 있는 오늘의 청춘 N포 세대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라고 외칠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의 청춘들에게 사랑을 방해하는 원수는 몬태규가, 캐플릿가의 악연이 아니라 엄혹한 신자유주의이고 냉정한 자본이 아닌가! (이들은 결국 화해할 일도 없으니 외려 더 무시무시한 원수다!)
니노 로타(Nino Rota)가 작곡한 <로미오와 줄리엣 (1968)>의 주제가인 <어 타임 포 어스(A time for us)>는 이렇게 노래한다.
"언젠가는 자유로운 사랑에서 비롯된 용기로
사슬이 끊어지는 날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지금 우리가 감추고 있는 사랑이 베일을 벗고
너무나 오랫동안 부정되었던 꿈들이 이루어질 거예요
당신과 나를 위한 멋질 삶을 마침내 맞이하게 될 그날
우리가 모든 역경을 헤쳐나갈 때 우리의 사랑으로
눈물과 고난을 인내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를 위한 그날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희망이 빛나는 세계가 열릴 거예요"
원래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무도회 장면에서는 원곡인 <젊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a Youth)>가 흘렀다. <어 타임 포 어스>는 <젊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멜로디를 갖고 있지만 후에 가사를 따로 입힌 곡이다. 영화 음악의 거장 헨리 메시니가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후, 편곡하여 싱글 레코드를 발매했고 이후 자니 매티스, 앤디 윌리엄스, 잉걸버트 험퍼딩크 등의 뮤지션들이 <어 타임 포 어스>를 불렀다. 뮤지션의 음색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으니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연애, 사랑도 사치라 생각하는 작금의 청춘에게 이 곡이 여전히 청춘의 사랑을 대변하는 주제곡으로 들릴지는 의문이다. 지금의 청춘 러브 송, 러브 테마는 순도 높은 낭만과 죽음마저 불사를 수 있는 맹목적 치달음을 쫓기엔 갈수록 현실 속에서 건조해지는 것만 같다.
▲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스틸
최근, 사카이 준코의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라는 에세이 신간 소개 글을 읽다가 "기나긴 반건조 시대"라는 표현을 읽었다. 그 글은 '중년의 한복판에 있는 당사자가 삶의 어중간한 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당혹감과 비애의 측면을 솔직담백하게 펼쳐 보인다'고 쓰고 있었지만 비단 중년만이 반건조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어느 구간이든 어중간하고 당혹하고 비애에 차 있는 반건조와 완전건조 상태 사이의 오늘의 사람들. 청춘 역시 기나긴 반건조 시대 속에서 점점 말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16년 대한민국 청춘들의 24시간, 1440분의 혹독한 하루하루를 취재한 『청춘 리포트(2016, 중앙일보 청춘리포트팀, 맥스미디어)』를 넘겼을 때 현재 청춘이 가장 고민하는 청년실업, 연애, 결혼, 내 집 마련은 모두 한 권의 청춘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의 문장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의 청춘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스러운 소네트 대신 신혼 전세 대란을 통과해야 하고 최근 2년 내 국내 신혼 부부 평균 결혼 비용으로 집계된 2억 7400만원의 숫자에 짓눌리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늘의 청춘에게는 어쩌면 배부른 사랑 타령은 아닌가.
청춘에게 마음껏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라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청춘에게 사랑에 빠진 시인이 되라고 맘껏 그리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우리를 대신해 이렇게 썼던 것이리라. "변덕스러운 달에 우리의 사랑을 맹세치 마세요. 당신의 가슴에 대고 우리의 사랑을 맹세해주세요."
어떤 시대고 사랑은 어려웠고 사랑은 복잡했다. 사랑을 방해하는 적들은 언제나 있었고 사랑은 이뤄지기도, 완성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비극적 판타지를 통해 청춘이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에서 이상적인 사랑담을 창출해낸 것이다. 그것이 극의 역할이며 드라마의 목적이니 말이다.
한 시인은 우리 말로 이런 시를 썼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그렇다. 가난하다고 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못 되겠는가. 신경림 시인이 쓴 이 시의 부제는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였다. (「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청춘 남녀가 가난하다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못 되겠는가. 그러나 청춘이 기꺼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라면, 가난한 것은 청춘이 아니라 바로 그 세상일 것이다.
영화 음악가 니노 로타(1911~1979)는 <태양은 가득히>, <백야>, <길>, <달콤한 인생>, <8과 1/2>, <대부> 시리즈 등의 영화 음악을 담당하였고 <대부 2>로 1975년 4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lavinyang@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