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점의 극단도 여지도 남기지 않고 사랑으로 소멸해버리는 일생을 사는 존재는 불행한 걸까, 행복한 걸까. 아마도 영화 <페드라Phaedra>의 스물 네 살 청년 알렉시스의 사랑의 경우가 그러할 진데, 스물 네 살이라니, 아아, 스물 네 살이라니. 사랑으로 모든 걸 잃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이가 아닌가.
▲ <페드라> 포스터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 '파이드라'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새 아내다. "빛나는"이라는 의미의 그리스 단어 파이드로스(φαιδρός)로부터 연유한 이름답게 이 빛나도록 아름다운 여자는 테세우스가 전처와 낳은 아들인 '히폴리투스'를 유혹한다.
아들은 새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파이드라는 아들이 자신을 강간했다는 거짓 편지를 남편에게 쓴다. 남편은 그 편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이후의 내용은 몇 가지 버전이 있기는 하나 결국 아버지가 바다, 지진, 돌풍의 신인 '포세이돈'을 시켜 아들을 죽이게 만든다는 결말로 끝난다.
그녀가 유혹했던 의붓아들이 탄 말들이 바다 괴물을 만나 죽게 되자 죄책감에 시달리던 파이드라도 끝내 자살한다는 비극적 결말.
극작가 에우리피데스, 세네카, 라신느, 로베르 가르니에가 이 고대 신화에 매료되어 저마다의 버전으로 각색해 파이드라 신화를 이어나갔다.
신화는 인간 욕망의 원형이라는 측면에서 끊임 없이 모방되고 변형되며 해석된다. 파이드라가 히폴리투스를 유혹한 이유는 그녀의 저주받은 숙명 때문도 있었지만 테세우스의 바람기 때문도 있었다. 외도하는 왕인 남편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 여왕이 왕자인 의붓아들을 유혹하는 근친상간의 드라마. 실패한 사랑의 쟁취와 잇따르는 광기와 파멸로 치닫는 불운들.
이 신화는 부도덕한 인간 감정과 관계의 정념에 대한 경고, 불운 앞에서 망가져 가고 나약해져 가는 인간상, 맹목적인 사랑과 복수를 비장하게 다루는데 여기서 이 서사의 그릇이 신화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언제나 신화의 주도권은 신에게 있다. 인간의 운명은 신에게 복속되고 신들의 의지가 인간을 좌지우지할 따름이다. 불행한 운명은 신이 내린 주문이었기에 인간은 불행을 행해야 할 따름이다.
▲ 영화 <페드라> 스틸
줄스 다신이 영화로 각색한 <페드라(1962)>에서 현대의 히폴리투스가 된 아들 알렉시스(안소니 홉킨스 역)는 새 어머니인 페드라(멜리나 머큐리 역)와 운명적 사랑을 나누다 아버지인 타노스(라프 발로네 역)에게 발각되고 말 대신 자동차 애스터 마틴을 몰고 질주하다 죽는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따라 부르며 절규하다 맞은편의 자동차와 충돌해 해안 절벽으로 추락해 사망하는 알렉시스의 질주 씬에서 다른 모든 음악을 제외하고 오로지 바흐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한 가지다.
바흐는 바로크 시대 교회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였으며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음악가였다.
바흐는 독일 작센주의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20년이 넘게 교회 음악가(칸토르)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140여 곡이 넘는 교회 칸타타를 비롯해 <마태 수난곡>과 <마그니피카> 등을 작곡했다. 독실한 루터파 신자였고 음악을 통해 신에게 봉사와 찬양을 바치는 숭고하고 장엄한 삶을 지향했던 바흐.
영화 <페드라>에서 바흐를 조롱하며 질주하는 알렉시스는 페드라와의 운명적 사랑을 정당화하면서도 페드라를 저주하고, 스물 네 살이라는 자신의 빛나는 나이로 사랑의 열정을 옹호하면서 마치 신에게 절규로 복수를 가하기라도 하듯이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바흐 작품 번호) 565'의 볼륨을 높인다. 이것은 그리스 불멸의 음악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불멸의 선곡이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1964)>의 음악 감독이었다. 그리스 독재 군사 정권에 대항한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그는 민속 악기인 부주키의 선율을 기반으로 작곡한 명곡이자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작곡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독재 정권에 의해 추방 명령을 받고 망명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음악을 통해 민중의 자유와 정의를 표현해 '20세기 그리스 최고의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다. 테오도라키스는 그 자신이 그리스인 조르바였던 것이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분명 이 지구에 세워져 있는 최고의 묘비명이 아닐까 싶다.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이 아름다운 묘비명 앞에서 잠시, 두려운 것도 바라는 것도 모두 내려놓기로 한다. 지난해를 내려둔 이 자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기를 기필코 바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lavinyang@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