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글랑블루(부천타임즈문화예술칼럼니스트)

▲ 영화 <더 리더>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제창되었다. 37주년을 맞이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 행사에서 5월 광주의 정신이 다시 울려 퍼진 것이다.

이것은 이 곡이 단순한 한 소절의 노래가 아닌 문화이며 정신이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 사이를 여전히 오가며 소통하고 공감하고 있는 정동의 '매개'라는 의미를 시사했다. 중계방송에서 유족의 추도사를 통역하던 수어(수화) 통역사의 눈물은 대통령의 눈물만큼 화제가 되었다. 유족이 증언한 비통과 비애, 참혹은 통역사의 눈물이라는 공통 언어로 옮겨졌다.

유신 독재를 이은 신군부는 그해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에게 폭력을 집단 자행했다. 시민에게 집단 발포가 명령되었고 전남도청 진압 작전의 일환으로 새벽의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다. 시민은 항거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시민공동체 주도의 민중항쟁, 5.18 민주화운동의 잔상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진상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망자와 실종자(추가적인 행방불명자)의 정확한 규모마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나치가 자행했던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는 국가권력이 관료적, 체계적으로 주도한 대량 학살이라는 의미 차원에서 5월 광주에서의 학살과 그 폭력성의 의미 본질을 공유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공저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치즘을 "새로운 야만성"으로 파악했다. 이 야만성은 결국, 근대 사회가 도달한 자기 보존 원리와 도구화된 이성의 병리 현상들로 둘러싸인 종착지(최종 진단지)였다.

철저히 타자를 억압하는 지배의 논리, 힘의 논리에서 기인하는 근대의 야만성, 흉포함. 이러한 야만성을 목격하고도 "무감동", "생각없음" 심지어 부정, 왜곡으로 일관하는 주체들을 바라보는 일이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1961년 4월 11일, 그의 전범 재판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진행되었고 아렌트는 그가 자행했던 악행, 야만성의 궁극에서 한 가지를 발견한다. 바로, 철저한 무사유, 생각없음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중에서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수행한 한 인간이 야기한 대파멸. 그것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총합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야기했다는 아렌트의 진술은 무겁고 무섭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도 때때로 나타나는(잠재하는) 아이히만의 자화상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체계, 권위에 너무 쉽게 생각없음으로 복종하고 그저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 속에 아이히만이 있다.

▲ <더리더>포스터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9년 작 영화 <더 리더>는 유대인 전범 재판을 배경으로 한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 한나(케이트 윈슬렛 역)는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부역자로 가담한다. 그녀가 전범재판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당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 서사다.

한나가 홀로코스트의 부역자가 되기 이전, 1958년 서독일의 노이슈타트에서 평범한 전차 검표원으로 일했을 당시, 우연한 계기로 그녀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남자 마이클(랄프 파인즈 역)이 이 영화의 중요한 정서 축을 감당한다.

10대의 마이클은 30대의 한나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책이란 인간의 인식과 사유가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물성을 지닌 도구이며 그 이상의 의미 세계다. 앞서 언급한 저서 <계몽의 변증법>의 표현을 쓰면, 책 자체가 이성의 계몽, 계몽의 변증법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한나는 경제, 문화,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한나에게 전차 검표원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직무 수행 능력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그녀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그녀의 생계를 영위하게 해주는 일이었을 뿐이다.

▲ 영화 <더 리더> 스틸

한나에게는 배움에 대한 욕망, 책의 내용을 독서가 아닌 듣기를 통해서라도 경험하고 싶다는 지적 욕구가 있었다. 그 동기는 바로 마이클과의 관계가 시작되고 이어질 수 있었던 주요한 원천이기도 했다. (마이클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소년이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는 계급에 속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그러한 문화적 자본을 충족하며 살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마이클은 한나와 구별되는 경제, 문화, 사회적 계급에 속한 소년으로 후에 하이델베르크 법대에서 공부한 변호사가 된다. 마이클의 인생에 한나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의미 능력에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너무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 차이의 결정적 연원은 경제적 능력, 계급의 차이다.

한나는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무기징역을 선고당할 때까지 밝히지 못한다. 그녀와 같이 부역자로 가담했던 피의자 여성들의 집단 모략으로 형이 일방적으로 가형되었던 순간에도 한나는 끝까지 자신의 치부를 발설하지 못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치부, 수치스러운 부분이었다.

한나는 법정에서 증언한다. 일이 필요했고, 끊임없이 몰려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선별해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한나는 또 하나의 아이히만이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히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문할 수 있다. 책이 제공하는 이성의 계몽, 이성의 진보가 반드시 사유를 돕는가? 책은 분명 사유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유의 체계, 계보를 생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지적, 정서적 감동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그러나 맹목적 독서는 순전한 무사유나 다름없다. 쓰여진 내용과 의미 그대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무사유나 다름 아니다. 거기에 주체가 자신을 반성하거나 발전하려는 의지, 의미는 없으며 주체가 새롭게 탄생하는 경험, 주체가 자신을 벗어나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 행위는 없다. 그러니 모든 읽고 쓰는 행위가 사유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은 홀로코스트의 부역자로 참여한 그녀의 폭력적 이력을 용서할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설령, 문자 지식을 통해 지식을 습득할 기본 능력을 갖춘 식자, 문해인이었을지언정 동일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던져볼 수 있다. 만약 한나가 문맹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이 질문은 이미 많은 것을 함의한다. 한나가 문맹일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이유, 그녀가 문맹이 아니었다 해도 사유 문맹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필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문해력을 갖춘 자여도 사유 문맹일 수 있다.

너덜너덜해진 세월호 선체, 실종자들의 뼛조각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매일 접하고도 우리는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반대하는 보수정당과 일부 보수단체의 변명 섞인 뉴스를 접하고도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다. 그러한 우리들 속에 아이히만이 있다. 한나가 있다.

오늘의 영화 음악은 <더 리더>의 ost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The Lady With The Little Dog)'이다. 영화에서 마이클이 한나에게 읽어주었던 안톤 체호프의 동명의 책이자, 한나가 감옥 안의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빌린 책. 스스로 글자를 익히고 깨우친 교본과도 같은 책이었다. 한나는 감옥에서 스스로 글을 깨우친다. 그러나 한나는 결국 감옥 안에서 스스로 죽는다.

결국, 인간은 인식의 감옥에 끝끝내 갇혀 있고 마는가? 책으로 읽을 수 있는 세계보다 책 바깥의 세계는 더 크고, 더 두렵다. "새로운 야만"은 지속되고 있다. 나는, 우리는 아이히만과 한나의 자화상을 넘어 어떠한 사유와 행위의 세계로 가야 하는가?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