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그랑블루(부천타임즈 문화예술칼럼니스트)

▲ 영화 아비정전 스틸

2003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장국영이 죽었다. 만우절이었지만 실제로 장국영이 죽었다.

그러나 필름의 시간은 늙지 않는다. 그 시간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불멸하고 그래서 슬프다. 죽어도 죽지 않는 장국영을 기억하는 스크린의 추모는 계속된다. 그의 육신은 죽었고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는 영화라는 시공에 여전히 존재한다.

'거짓말처럼 장국영이 죽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거짓말이라는 수사가 이렇게나 잘 어울려도 될 일인가. 4월 1일이 만우절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정말로 거짓 같다. 그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 믿기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배우로서의 한 생,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었으므로 죽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페르소나, 그의 자취들, 그의 작품들.

<패왕별희>와 <아비정전>이 돌아왔다. 그의 14주기를 맞아 3월 30일, 극장가에 두 영화가 재개봉했다.

▲ 영화 아비정전 스틸

<아비정전>의 재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순간 필자에게 스쳐지나간 건 습한 여름날의 기운과 빗소리였다.

순간 영화에서 몸으로 전해지던 축축한 느낌이 말도 못하게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필름은 그렇게 온몸으로 감각을 환기시킨다.

연달아 그리워진 건, 런닝셔츠를 입은 채 거울 앞에서 지금 이것만이 전부라는 듯 춤추던 한 남자의 맘보춤, 장국영의 춤이었다.

아비(장국영 역)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 자기 자신만 결국 사랑할 뿐인 남자다.

그러나 처음에도 종국에도 자기 자신에 어떤 미련도 없는 남자다. 현재에 미련이 없을 만큼 현재를 사는 남자. 그가 그 자신만 사랑할 줄 아는 남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남자는 거울 앞에서 맘보춤을 그렇게나 멋들어지게 출 수 있는 남자가 되었으리라. 그는 멋을 내지 않으므로 역설적으로 멋있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가 그렇게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주는 춤이 아닌 춤이라서 그렇다. 자신을 입양한 양어머니에게 '정 안되면 같이 죽으면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뼛속까지 고독하고 허무해서 생에 도저한 미련하나 없는 남자, 그래서 '발 없는 새'인 남자.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어.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래."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내뱉는 아비는 발 없는 새가 아니고는 아무 것도 아닌 남자다. 허무한 나르시스트이고 죽고 싶으면서 살고 싶고, 살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은 남자다. 이 간극과 거리 사이의 시공에서 발 없는 새가 비를 맞으며 날아간다.

그는 평생 단 한번 땅에 내려앉고 싶을 뿐, 영원히 부유하고 싶은 허무의 인간이다. 상실의 인간이다. 도처의 인간, 야생의 인간이다. 하나의 청춘이다.

수리진(장만옥 역)에게 손목시계를 보여주며 함께 한 1분을 가리켰고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던 남자. 그리고 정말로 영원히 기억되어버린 남자. 그러나 남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를 기억했고 기억 속에서 사랑했다.

아비는 결혼을 원하는 수리진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애착을 원하는 루루에게서도 멀어진다. 그는 여자가 필요한 남자이지만 동시에 여자가 필요하지 않은 남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필요하다. 이 남자 곁의 사람들은 모두들 맴돌 뿐이다. 평생 단 한번 땅에 내려앉는 것은 출발도 도착도 없는 기약 없는 생이고 그 생의 여정에 정착, 애착은 날갯짓을 무겁게 하는 구름일 뿐이다.

▲ 영화 아비정전 스틸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루루를 사랑하고 이름도 없이 경찰관이었다가 떠도는 게 좋아 선원이 되는 경찰관(유덕화 역)도 수리진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때 내렸다 습기를 머금고 사라지는 비처럼 세상으로부터 씻겨져 내릴 뿐이다. 아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들 씻기고 잊힐 뿐이다.

왕가위 감독과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은 그렇게 씻기고 망각되는 존재의 형형한 자국들을 삶과 몽타주(montage) 한다. 영화에서 몽타주되는 것은 삶과 기억이고 기억과 상처이며 존재와 불안이고 허무와 고독이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고독의 시간과 이제 지나가야 할 고독의 시간이다. (*몽타주는 프랑스어로 '모으다, 조합하다'라는 뜻이다.)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나는 이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지상에서의 단 1분은 발 없는 새인 아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발이 없는 새는 바람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발이 있는 새는 바람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아비는 바람이고 수리진은 발이 있는 새다. 둥지를 찾는 새다. 

아비는 수리진을 떠난다. 하지만 떠난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아비는 수리진에게 도착한 적도 없었으니까. 아비라는 새의 다른 이름이 바람이므로. 하지만 수리진이라는 새는 바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바람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될 수 있는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일 뿐이다. 우리는 그 외의 어느 존재도 될 수 없다. 그 과정에 한 생이 필요하다. 한 생에게는 스무 해의 과정일 수 있고 한 생에게는 마흔 일곱 해의 과정이 생일 수도 있다.(장국영은 마흔 일곱 해를 살다 자살했다.)

우리 자신의 우기, 건기를 지나 도착하게 되는 숲에서 바람에 자신의 맨몸을 말릴 때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입양아인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곳의 필리핀은 야생의 열대우림으로 그려진다. 습한 우림 사이로 난 길, 대저택에서 자신을 끝까지 숨긴 친어머니를 뒤로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걸어가는 아비의 뒷모습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바람처럼 불었다가 바람으로 끝나버리는 한 남자의 숨소리를 듣는다.

아비정전은 해석할 수 없는 영화다. 해석해서도 안 되는 영화다. 맘보춤을 해석할 수는 없고 발 없는 새를 해석할 수는 없으며 지나버린 1분을 해석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식으로 말해 생은 결국 ‘무의미의 축제’다. 무의미는 존재에 대한 의례이기 때문이다.

▲ 영화 아비정전

존재의 모든 무의미한 것들 때문에 의미는 빛난다. 의미는 무의미들 때문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1분은 지나가고, 이 문장을 마칠 때 나를 통과한 1분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흘려보내야 할 야생의 바람의 시절. 아비정전의 영문 제목이자 부제는 'Days of being wild(데이즈 오브 비잉 와일드)'이다. 여기에 대한 직역, 의역이 분분한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오역의 시도를 좋아한다. ‘그냥 살던 시간들’.

그냥 살던 시간들 속에 한 편의 영화가, 음악이, 생이 있다.

장국영이 14년 전 4월1일 죽었다. 발 없는 새는 지상이 아닌 영화에 떨어졌다.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