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글랑블루(부천타임즈문화예술칼럼니스트)

내진 설계를 배우러 유학 온 건축학도 '두현(이선균 역)'과 요리를 공부하러 온 '정인(임수정 역)'이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는 나고야 시내 한복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계의 흔들림은 은유적으로 시작됐는지 모른다.

"지구가 트위스트를 춰도 절대 안전한 곳이 있는데, 나랑 같이 갈래요?"

건축가가 아내를 위해 내진 설계한 집의 식탁 아래서 그들은 연인 관계를 예감하고,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져 열심히 사랑을 하다 결혼한다. 결혼 이후, 시간은 7년 후로 점프한다.

▲ <내 아내의 모든 것> 포스터

7년 차 부부의 아침. 아내는 아침부터 만사에 신경질이 나 있다. 남편은 다 귀찮다. 핸드폰에 '투덜이'라 저장된 아내가 신혼 초부터 투덜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다 사랑스러운 아내는 투덜이가 됐고, 제발 좀 이혼하고 싶은 아내가 됐을까.

두현은 정인과 잠시 떨어져 살고 싶어서 강릉의 사무소로 전근을 신청한다. 정인은 지방 생활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멀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자 두현을 몰래 따라온다. 정인이 강릉에서의 첫날 밤, 완벽해 보이는 저녁 식사를 정성스레 준비한 후 두현을 먹이면서 던지는 말은 정인의 내면을 그대로 묘사하는 자기 서사에 다름 아니다.

"집이 소중한 게 아니라 가정이 소중한 거지. 사람이 살고 음식 냄새나고, 음악이 흐르고, 결국은 행복이 가득한 곳. 그런데 자기 머릿속엔 집밖에 없어. 그 집안에 아무것도 없다구."

정인은 공허하다. 정인에게는 남편이 있지만, 남편의 마음속 정인과 함께 사는 집은 이미 빈집이라는 사실을 정인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정인의 짜증과 신경질은 그런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자신의 기민함에서 기인한다. 두 사람이 맺어가고 일구어나가는 관계에서 한쪽이 훨씬 더 깊고 예민하게 관계의 변화를 이미 알아차린 긴장! 그 긴장을 과다한 말과 리액션으로 바꾼 여자가 정인이다.

그런데 두현이 이혼을 하기 위한 극적 방편으로 선택한 만남의 방식 이후 정인이 점점 변한다. 정인을 유혹하는 데 개입된 존재 ‘성기, 카사노바(류승룡 역)’가 두현이 알고 있는 정인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건네받는다.

두현이 정인과 연인, 부부로서 밀착된 관계를 가지며 시간과 공간을 경유해 얻어낸 한 인간의 취향, 기호, 경향성이 성기에게 정보로써 전수되고 성기는 그것을 도구 삼아 정인에게 접근해 정인을 유혹한다. 사실 이 유혹의 기술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거든,

그/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고, 그/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같이 싫어하라!

그런데 말로는 누군들 못할 이렇게나 쉬운 관계의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스틸

두현은 정말 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알고 있다고 여길 수 있었을까? 건축가인 두현은 아내와 살 집을 직접 설계했다. 집은 정인과 두현의 관계에 대한 공간적 은유다. 두현 자신이 설계했으니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믿었을 것이다. 허나 아니었다. 집은 무너지고 흔들릴 수 있다. 가장 잘 알 것이라 자신했던 내 곁의 타자를 우리는 결코, 절대로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다 안다는 오만만큼 강한 착각은 없다.

몇 년 전, 관계 때문에 마음에 자주 생채기가 나고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한 선배가 필자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조언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관계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자는 병든 자, 라고.

어렸고 아직 세상의 많은 관계 맺기의 가능성과 최후들을 경험하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당시에는 그 조언이 내게 피부처럼 밀착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민규동 감독의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다가 선배의 그때 그 조언이 떠올랐다.

두현은 자신이 집의 설계자이니 그만큼 그 집을 잘 아는 자가 없으리라 확신했고, 관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착각했기에 카사노바까지 고용했다. 그건 이 관계의 미래전략을 주도하려고 했던 두현의 포즈였다.

누구에게도(심지어 같이 사는 남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던 외로웠던 여자 정인은 그녀에게 친절했던 카사노바에게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뿐. 정인은 정인의 방식으로 두현을 끝까지 사랑할 줄 알았다. 사실 그건 매우 정직하게 작동하는 정인의 내면 때문이다. 명확하고 단순하다. 정인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여자다. 일, 몸, 관계를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고 살아나갈 줄 안다.

정인이 발산하는 행동, 말은 과잉이 아니고 정인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성기와 있는 그대로 공유했기 때문에 편안할 수 있었다. 과잉의 판단 기준도 결국은 타자의 시선일 뿐이니까.

관계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으로 살기의 주도권을 먼저 갖추지 못한 자일 확률이 있다. 자기 삶의 주인인 자는 자신이 중심에 있기에 남에게 자기를 중심에 놓아달라고 매달릴 이유가 없다. 자기가 그런 방식으로 위치짓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감정도, 관계의 양상도 모두 변할 수 있다. 사랑과 열정은 식기도 하고 변질하기도 하고, 그래서 고통을 준다. 허나 자신이 있어야 할 중심 위치, 좌표의 존재를 잊지 않으면 고통은 견딜만 해진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좌표마저 잃어버린 존재가 되는 일이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의 소중함. 정인도 두현에게 물었다. 지금 당신이 어떤지, 우리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라고. 정인은 두현과의 관계 맺기에서의 외로움 속에서도 건강한 자기 객관화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자기 중심점마저 타자에게 내어주는 관계는 자신을 내버리고 자신을 유혹시키는 일이다.

샹송을 좋아하는 정인이 두현에게 불현듯 춤을 추자며 즉흥적으로 음악을 틀고 몸을 들썩일 때, 오랜만에 남편의 어깨에 몸을 안길 때 흘러나오는 곡은 박성희가 부른 <앙브라스 므와(Embrasse - Moi)>다. 민규동 감독이 직접 프랑스어로 작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embrasse'는 프랑스어로 포옹이란 뜻을 지녔다. 나를 껴안아 달라는 이 몸짓의 구애 속엔 외로움이 담겨 있다. 자신을 껴안아 달라고 말해야 포옹이 가능한 관계는 외롭다. 허나, 껴안아 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는 관계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왜? 관계는 변할 것이니까.

그럼에도, 껴안아 달라고 표현하는 것은 용기이고 사랑의 지속가능한 몸짓이다.

정인과 두현은 이혼할까?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처음의 그 흔들림으로.
 
잊을 수 없는 최초의 흔들림을 갖고 있는 관계. 관계가 흔들릴 때 그 최초의 흔들림으로 복원될 수 있는 미동을 기억하는 한, 관계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쉽게 매몰되지도, 붕괴되지도. 비록, 때로 조금은 흔들리는 순간이 올지라도 괜찮다. 그게 집에 사는 사람인걸.

그걸 알고 있는 동반자와 같이 사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