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그랑블루(부천타임즈 문화예술전문 칼럼니스트)

필자는 요새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연주하고 싶은 어떤 곡이 있기 때문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아리아의 연주를 꿈꾸므로 하루의 끝에 나의 시간을 응집시킨다는 것만큼 찬란해지는 일은 없다. 시간의 상대성에 감각의 절대성으로 연대하는 일은 세계에 대한 온전한 소유에 동참하는 일이 아닌가. 
 
괴테가 '건축이란 얼어붙은 음악'이라는 문장을 썼을 때 그가 언어로 옮긴 미적 정신은 또한 '음악이 얼어붙은 건축'이 되기도 한다는 관계성이었다. 미적 관계성과 연대를 이루는 문장은 살아있으므로 얼어붙은 무언가를 녹인다.

▲ 잉글리쉬 페이션트 포스터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에서 음악 감독 가브리엘 야레는 원숙한 대가답게 스크린 속에 이처럼 얼어붙은 건축의 속살들을 오래 태운 잔잔한 불처럼 입혀두었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말없이 전달한다. 때로 위대한 어떤 영화 음악이란 귀로 '보게' 만든다는 것을. 위대한 어떤 영화는 육체를 미적 연대성에 초대한다는 것을.

감각의 깊은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실재하게 만들어주는 영화, 어쩌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여야만 했고, 그래서 아리아가 흐를 수밖에 없었을 영화.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다가오는 11월 30일에 재개봉을 한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사랑의 역사가 20년 만에 극장에 돌아왔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중, 사하라 사막 북부 지역을 탐험하며 지도를 제작하던 국제 지리학회 회원들과 사막을 중심 무대로 펼쳐진다. 지도 제작 캠프에 속해 있던 탐험가 '알마시(랄프 파인즈 역)'는 영국인 귀족 부인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역)'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캐서린은 남편인 제프리 클리프튼(콜린 퍼스 역)과 함께 어느 날 경비행기를 타고 알마시가 머무르는 사막의 캠프에 도착(하강)했다.

이 사랑의 무대가 전쟁 중의 '사막'과 '경비행기'의 도착(하강), '지도 작업'의 지리 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광활한 서사의 사막을 건널 비행 연료를 영화 언어들이 품고 있다는 내밀한 속삭임, 진동이다.

우아하며 시적인 영화적 속삭임과 진동들은 연인으로 이루어진 국가, 국경 없는 사랑의 쇄골, 동굴, 유영하는 사람들이 그려진 고대의 벽화, 일기장, 골무, 베일, 촛불, 화상으로 번지면서 서걱이는 모래 폭풍 속 모래 알갱이들처럼 직조된다.

또한, 인도인 폭탄 전문가 킵(나빈 앤드류스 역)과 그를 사랑하는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쉬 역), 피아노, 성당, 카라바지오(윌렘 대포)가 함께 빚어내는 서사 속에서 전쟁이라는 인간 역사 속에서의 사랑에 대한 자유와 소유의 궁극적 열정이 펼쳐진다. 

▲ 잉글리쉬 페이션트 스틸

이 영화가 말했듯 사랑이란 두 사람이 만든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가 소유한 모든 자유와 소유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의 역사 속에서 연인은 육체와 정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때로 깊은 심연 속을 헤매기도 한다. 그 속에서 오래된 벽화를 남기기도 한다. 연인의 동굴 앞에서 오래된 철학의 비유 하나를 소환하는 일은 낡았지만 오래된 심연을 더듬는 일이기도 하다.
 
진리는 험준한 길을 지나 태양의 빛에 직면하는 해방에 있다는 것을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427-347년경의 그리스에서도 태양은 떴고 사람들은 철학을 했으며 사랑을 했다. 누군가는 동굴 속에 갇혀 지나가는 사랑의 환영,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며 누군가는 사슬을 끊고 사랑이라는 태양의 빛을 온몸으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사슬에 갇힌 그림자는 사랑의 진리가 아니다. 플라톤의 비유를 이 영화의 사랑에 수식하는 일은 인식의 고답적인 수사나 도피가 아니다. 영화에서 동굴이 사랑의 진리에 촛불을 밝히고 끄는 핵심적인 공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결국, 사랑은 사랑을 횡단하는 역사다. 사랑은 사랑의 진리를 횡단하고 해방을 횡단하며 사랑의 사슬, 육체의 동굴을 가로지르는 역사다. 그 역사 가운데 매일 새로 그려지는 가장 오래된 지도다.

이 지도에 국경은 없다. 축소도 없으며 어떠한 상징적 지표도 단지 연인에게만 의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연인은 연인이 그려내는 지도의 표식을 감각할 수 있다. 연인이 사랑의 역사를 살아내는 방향만이 지도에는 있을 뿐이다.

연인은 그들만의 약속된 기호로 국가를 이루고 지도를 그려낸다. 이 기호는 사랑만이 해석할 수 있는 진리일 것이다. 기꺼이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 자, 기꺼이 사막을 횡단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견지일 것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어떤 사랑의 역사는 전한다.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lavinbeethoven@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