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dden Figures

필명:그랑블루(부천타임즈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영화는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14, 15, 16을 차례로 외우며 길을 걸어가는 소녀를 부감 샷으로 조망하며 시작된다. 14, 15, 16... 다음은? 소녀의 입에서 '소수(prime)'가 나온다. 18, 또 '소수'가 나온다. 소수를 외우며 걷는 범상치 않은 소녀.

때는 1926년의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수학 천재 소녀는 주에서 흑인이 진학할 수 있는 최고의 학교에 2년이나 빨리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이 비범한 소녀 '캐서린'은 첫 시간에 방정식을 술술 풀이하고 선생님과 선배님들 앞에서 매우 간단하게 설명까지 한다. 천재 소녀들의 미래 '들' 은 그렇게 시작된다.

▲ 히든-피겨스 포스터

천재적인 수학 능력자인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핸슨 역)', 뛰어난 책임감과 리더십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배운 기계학이 기초가 되어 독학한 프로그래밍 능력까지도 갖추고 있는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역)',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 잭슨(자넬 모네 역)'.
 
이 세 명의 천재 소녀들은 투쟁하는 여성으로, 또한 투쟁하는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NASA의 프로젝트에 기초를 이루는 수학, 전산, 엔지니어링 각 분야의 핵심 인력들로 자라난다.

하지만 '이스트 그룹'이라 불리는 NASA의 흑인 인력들은 전부 임시직으로서 고용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며 인종 차별, 성 차별을 겪으며 부당한 대우 속에서 활용되는 인적 자원들이다. 

전산원 캐서린이 본부장 '알 해리스(케빈 코스트너 역)'가 이끄는 '우주 임무 그룹'의 일 원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들의 활약 및 차별의 민낯들을 폭로한다. 캐서린의 상사 '폴 스태포드(짐 파슨스 역)'는 재검토가 필요한 보고서의 주요 내용들을 보안이라는 핑계를 들어 일부러 마스킹 처리해서 캐서린에게 전달해주고 캐서린의 지성과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등 인종 차별이 바탕이 된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도로시를 대하는 상사 '비비안(커스틴 던스트 역)'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어 흑인 전용 화장실이 설치된 800미터나 떨어진 건물로 매번 뛰어가야 하는 것은 물론, 커피조차 함께 마시기를 꺼리는 팀의 분위기는 캐서린을 단번에 경직되게 만든다.

시스템의 경직은 폭력적으로 개인의 창조성과 능력을 파괴한다. 그곳에서 '아직 존재한 적이 없는 수학'을 해야만 러시아와의 우주 경쟁에서 이겨 국가적 우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는 거대한 중압감과 책임감을 지닌 상사 스태포드는 유일하게 캐서린을 흑인이 아닌 한 명의 전산원, 나아가 한 명의 수학자로 '발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스태포드는 본부장이라는 권력의 위치를 지닌 백인 인텔리 남성이다. 결국, 권력 이데올로기의 협조를 얻어야만(다른 말로 결재를 받고 승인을 받아야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겨우 얻어낼 수 있는 비대칭적인 관계의 폭력성 속에 캐서린이 존재하고 다수의 여성이 존재한다.

▲ 영화 히든 피겨스

여성이 여성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는데 남성이 필요한 것 자체부터 거대한 차별이다. 그러나 이 차별의 불편함을 영화는 비교적 불편하지 않게 다루는 측면이 있다. 빠른 스토리 전개의 과정에 영화가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흡사 차별에 맞서는 이 투쟁의 생존사가 매우 스피디하고 이지하게 마치 궤도 계산 하나를 방정식으로 가뿐히 처리하는 방식으로 그려지는 것은 영화의 아쉬운 점이다. 투쟁은 그렇게 쉽게 계산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쉽게 눈으로 결과 값이 도출되지도 않으니까.

도로시는 NASA에 들어온 IBM 컴퓨터가 인간 전산원 팀 전체를 대체하게 될 미래를 간파하고 '포트란'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직접 학습한다. 자기 자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팀 전체를 학습시켜 미래의 대체 불가능한 인력으로 준비시키는 리더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

메리는 최초의 NASA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요건 중 흑인에게는 이전에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법정에 선다.(인물들의 비중 및 중요도 측면에서 캐서린에게 서사의 비중이 집중되느라 상대적으로 메리가 부각되지 못한 점도 영화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측면이 있다.)

'남자만 지구를 돌라는 규정은 없다'며 캐서린은 업무에 필요한 실시간 정보를 얻기 위해 허락되지 않았던 브리핑의 참석을 용기 있게 주장한다. 메리는 "오늘 재판에서 있을 어떤 심리가 판사님을 '최초'로 만들까요?"라는 명대사를 법정에서 던지며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싸운다.

출입금지 구역인 IBM 컴퓨터실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익히고 실제 가동시켜 결과 값까지 도출하는 도로시는 IBM 때문에 수작업 궤도 계산이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IBM을 활용해 궤도 계산을 할 수 있는 인력이 되어 IBM 전산 연구실의 상근 관리자로 30명 규모의 팀을 이끌게 된다.

이들은 싸우고 투쟁하고 또다시 싸워서 NASA라는 거대한 지적 권력 세계의 우주에 재진입한다. 

냉전 시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 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NASA의 긴박함과 절실함, 백인과 흑인을 분리했던 짐 크로우 법(설명: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법,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함)이 보여주는 차별의 단면들 속에서 세 여성의 생존 투쟁기는 인종 차별이면서 페미니즘 투쟁의 중요한 한 면을 보여준다.

▲ 영화 히든 피겨스 스틸

"진정한 페미니즘은 '인간해방운동'이다!"라 선언하였던 페미니스트 '벨 훅스(bell hooks)'의 유명한 테제를 떠올린다. 영화를 보고 불현듯 떠올랐던 그녀의 저서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원제: Feminist theory : from margin to center), 모티브 북, 윤은진 역, 2010)>를 나는 다시 꺼냈다.

저자 자신이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가였기 때문일까. '젠더·인종·계급·문화의 정치학'을 넘어서 영화의 맥락들과 상당 부분 교차적으로 독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영화 <히든 피겨스>는 너무나 스피디하고 이지하게 스토리를 전개하느라 진지한 페미니즘 투쟁의 교차 독해를 방해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벨 훅스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결국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간해방운동으로 승화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차별로부터 해방되는 장소, 모든 차별받는 인간이 있는 그곳에 진정한 페미니즘이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연대와 동참과 지지와 투쟁의 과정은 결코 2시간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한 편의 영화는 페미니즘 운동의 아주 미약한 한 조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히든 피겨스>는 달린다.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투쟁을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려나간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페미니즘 러닝 타임사의 아주 작은 조각이자 일부가 될 것이다. <히든 피겨스>의 '숨은 주역들'은 숨은 여성들, 그 중에서도 숨은 흑인 여성들이 쟁취한 투쟁의 아주 작은 달리기 구간의 승리가다.

OST로 삽입된 퍼렐 윌리엄스의 '러닝(Runnin')'은 그 작고 험난한 달리기의 일부다.  참고로 퍼렐 윌리엄스는 영화 <히든 피겨스>의 제작자임과 동시에 음악 감독을 맡았다.

필자 그랑블루님은 학부에서 '영화'를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