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부천여성의전화 회원)

2000년의 아주 추운 날.....4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열정적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 때,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가슴속의 아픔을 안고 있는 상태로 극장을 찾았다.

겨울이라 그랬을까? 유난히 커플들이 눈에 많이 띄었던 극장가에서 나의 영화 선택 조건은 오로지 ‘(커플들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관객이 적은 것’라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고, 그래서 선택하게 된 영화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었다.

▲ ⓒ영화 포스터

그 영화가 그렇게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당시 열 명도 되지 않는 관객들과 함께 그 영화를 보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선택하긴 했지만 그것이 내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기억이다.

그리고 그 영화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을 일부러 찾아서 보는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 살아있는 여성 캐릭터의 힘이, 나처럼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나쁜 교육’, ‘나 없는 내 인생(이 작품에서는 감독이 아닌 제작자로 참여했고, 한국에서는 최근 개봉했다)’을 거쳐 2006년 <귀향>으로 다시 우리를 찾았다.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 ‘라이문다’. 그녀에게는 ‘파울라’라는 딸이 있는데 어느 날 딸로부터 급한 연락이 온다. 자신을 성추행하려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딸을 살인자로 만들 수 없었던 라이문다는 남편의 시체를 처리한 후, 자신만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날, 라이문다의 동생 ‘쏠레’는 이미 죽은 엄마(이렌느)의 유령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엄마 유령은 라이문다에겐 선뜻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쏠레의 집에 기거하며 그와 함께 살아간다.

이렌느는 라이문다에게 나타나기를 꺼린다. 라이문다에게 있어 엄마는 원망과 아쉬움의 대상이고, 이렌느에게 라이문다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존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가슴속에 가득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

▲ ⓒ귀향 스틸

딸은 그렇게 원망하던 엄마의 방귀냄새만으로도 엄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엄마 입장에서, 혹은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장 힘들고 낙심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난 어머니.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여성들의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그간 우리가 쉽게 보아왔던 드라마나 영화 속의 여성의 모습들, 예를 들면 ‘여성의 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어머니는 있어도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 ‘남성의 들러리로 존재하는 여성’의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모성애’이기에 어머니의 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표현되긴 하지만 그것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헌신과 봉사만을 강조하는-종류의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는 주변 인물을 통해 계속해서 ‘자매애’를 표현한다. 가까운 이웃인 아우구스티나가 라이문다의 이모를 간병하고, 라이문다의 엄마가 아우구스티나를 간호하는 모습은 여성만의 유대감과 자매애로 결국 화합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에 그릇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여성은 이미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 도입부의 카메라의 움직임은 상당히 거북하다. 남편의 시체를 정리할 때도, 대사 가운데도, 라이문다의 가슴과 몸매는 무척이나 부각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라이문다역을 맡은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인기스타의 몸매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라이문다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 즉,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느껴진다.

▲ ⓒ귀향

여성의 몸,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지 이제껏 수많은 영화들에서 그것이 남성을 위해 억지로 과장 되고, 남성의 시각에서 보여져왔던 것이 문제였으니까. 남편의 시체를 처리한 칼을 닦으면서도 라이문다는 여전히 아름답고 멋있다.

등장인물 중 어느 한 사람도 제대로 된 남성과 함께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있지 않는, 여성들만의 사랑과 우정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신파조로 흘러가 억지로 관객의 눈물을 짜내거나 동정심을 유발하진 않는다.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 복장도착자와 같은 비주류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 비해 <귀향>은 적절한 코미디와 판타지가 섞여 있는, 쉽게 보고 웃을 수 있는 작품이며 한국 여성의 정서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이다. 물론 처음에는 비영어권 영화가 주는 특유의 어색함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다에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런 어색함도 영화의 내용에 이내 자연스럽게 묻혀 버린다.

▲ ⓒ귀향 스틸

라이문다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보통의 헐리웃 영화처럼 그들의 관계와 연애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영화. 되려 “남자가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다”는 듯 그런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자식을 위해 “자장면도 싫다고 해야 하는” 어머니를 최고로 생각하는 우리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어머니상과 달리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어머니 역시도 딸과 같은 아픔을 가지고 어떤 때는 딸에게 실수도 하는 동등한 위치에서 모성애를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어 줄 것이다.

▲ ⓒ귀향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에 그의 이름만 입력해도 쏟아지는 다양한 수식어구들-‘여성에 대한 찬미’, ‘세상의 모든 여성을 위한 영화’ 등-처럼 앞으로의 그의 작품들 역시 그 선상에 놓여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엄마 없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영화가 끝난 뒤에도 많은 관객들의 머릿속에 남았을 라이문다의 대사는, 세상의 모든 여성과 어머니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알모도바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최현민(부천여성의전화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