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열(고교교사)

 
올 한 해도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때로는 슬픔을 안겨주었던 2005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때쯤이면 언론은 저마다 10대 뉴스를 발표하며, 역사 속으로 저무는 한 해를 아쉬워한다. 지난 날의 사건을 화면과 사진을 통해서 돌아보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시간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난 날의 삶을 언어를 통해서 돌이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즉 언어란 사회적 산물로, 언중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특히 유행어는 일종의 신어로 동 시대의 관심사나 사회현상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유행어를 곱씹어보면 우리가 무엇을 고민하고 살아왔는지 돌이켜 볼 수 있다.  

우리시대 자화상 냉소적 어투로 표현

올해 유행어 중에는 영화‘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이 표현했던 ‘너나 잘하세요’를 꼽을 수 있다. 이 말에서 ‘너’는 비존칭 대명사이고, ‘-하세요’는 높임의 뜻을 담은 어미이다.

따라서 둘은 함께 호응할 수 없는 모순 어법이다. 대게 유행어는 신기한 어감이나 해학적인 표현 등이 뒷받침되어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이러한 모순의 표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싸늘한 표정으로 이 말을 던지는 것처럼, 이 말은 ‘너’에게 ‘잘하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이 말은 평상시 정숙한 이미지를 보이던 여배우가 의외로 던진 대사여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요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냉소적인 어투를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최근 사람들은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는 착각 논리에 빠져 있다. 오래전에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네 탓이오’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도 결국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잘못된 문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올해 유행했던 말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됐거든’이라는 말이다. 원래 우리말에서 ‘-거든’은 조사(네가 작가거든 글을 써야지/멸치도 고기거든 꽁치라면 훌륭한 고기가 아니냐)로 쓰이기도 하지만, 어미로도 많이 쓰인다.

특히 어미로 쓰일 때는 조건을 삼아 말할 때(좋거든 가져라), ‘-는데 하물며’의 뜻으로(어린아이도 해내거든, 어른이 못할까), 이유를 밝히거나 다짐을 나타낼 때(내가 그를 만났거든), 납득할 수 없이 이상함을 나타낼 때(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거든)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나 올해 ‘됐거든’은 ‘됐-’이라는 어간에 어미 ‘-거든’이 결합하여 독특한 어법을 나타냈다. 즉 상대방의 제안이나 기타 의견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됐거든’을 뱉어냈다. 이는 표면상으로는 거부를 의미하지만, 상대방과의 대화 단절을 통보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비난하고 무시하는 정서를 담고 있다.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사고 언어로 표출

이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부정적인 가치 지향으로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사고가 언어현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느낌이다. 사실 최근 청소년들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 개별화된 존재로서 스스로 그 집단으로부터 격리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사회에 대한 헌신보다는 지나치게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철저한 자기 생존을 위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원천이 또래들의 대화와 혹은 제안을 거부하는 ‘됐거든’의 언어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올해 개그맨이 유행시킨 ‘그까이꺼~뭐’도 우리가 많이 따라 하며 웃었던 말이다. 어떠한 어려운 일 앞에서도 ‘그까이꺼~뭐’하면서 자신감을 표현한 개그맨은 경비 아저씨 복장을 하고 있다.

직업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경비 아저씨는 능력이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조금은 모자라는 듯한 경비 아저씨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 시대에 거창한 이념이나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비꼬는 장면이 우리의 가슴을 움직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이해득실에 연연해하고, 하찮은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인생을 긴 안목으로 설계하지 못하고, 욕망의 늪만 키우고 있다. 그러나 경비 아저씨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욕심을 집어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지간한 주변 사에 대수롭지 않게 ‘그까이꺼 뭐~’라고 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아름다운 삶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다. 사실 삶의 모습은 성공에만 있지 않다.

시대는 세상을 넉넉하게 볼 줄 아는 사람 원해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볼 줄 아는 아량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보기에는 다소 어수룩해 보이고 모자란 듯하지만, ‘그까이꺼 뭐~’라고 말하며 세상을 넉넉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형이다.
 
올해 유행어 중에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강원도 사투리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는 점에서 다시 새겨보고 싶다.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좀 모자란 듯한 배우가 했던 ‘마이 아파(많이 아파)/니 자들하고 친구나?(너 쟤들하고 친구니?)’ 등의 대사는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영화는 관객 동원에서 기록을 세웠다는데 무엇보다도 영화가 잘 되었겠지만, 우리 모두가 따뜻함을 그리워하며 사는 마음이 반작용으로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는 생각도 있다. 즉 우리는 지나치게 거대화해 가는 사회 조직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강원도 출신이 아니어도 너나 할 것 없이 말끝에 ‘-드래요’라는 어미를 붙이며, 영화 속에서처럼 따뜻한 공동체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유행어는 새롭게 만들어진 말로 시대를 풍자한다. 유행어는 언중이 의도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방송에서 연예인이 의도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행어는 사회상을 엿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유행어의 습관적 사용은 언중의 의사소통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사용자에 대해 경박한 느낌을 준다.

인간 생활의 대원칙은 협동에 있다. 언어의 통일도 그 중에 하나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마음을 맞추기에 노력했으면 한다. 마음을 맞추다보면 언어의 통일 같은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 이외의 인간사도 모두 저절로 이루질 것이다.

<윤재열님은> 현재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느끼는 단상들을 글쓰기의 소재로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시해설서 '즐거운 시여행'(공저), 수필집 '나의 글밭엔 어린 천사가 숨쉰다', '삶의 향기를 엮는 에세이'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