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숙(시인/부천예총 기획위원)

예술의 힘은 위대하다. 거창한 명제 앞에 사람들은 어쩜 웃으며 말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사치스런 말장난이라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술이란 의식주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삶이 절박한 사람들 앞에선 나 스스로도 시를 쓴다는 말을 당당하게 못할 때가 많은 걸 보면, 의식 깊은 곳에선 이미 그에 동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찾아가는 열린무대

 
부천시가 문화특별시를 표방하고 난 후 많은 정책적 배려도 있었지만, 지역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이 일부여서, 그 외의 지역민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찾아가는 작은 무대'는 기존의 공연이란 정형성을 탈피한 최초의 시도였다.

원미구, 소사구, 오정구의 3개 구 중 큰 문화행사들이 주민들의 운집이 가능하고 편리한 시청주변이나 중앙공원 일대를 중심으로 개최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소사구나 오정구는 소외되었고, 일부러 문화행사를 즐기러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주민이 원하고, 주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는 행사를 마련하려 기획했기에 때론 시장 한복판이 그 무대가 되기도 하고, 도심의 소공원이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동행한 곳은 오정구에 있는 노인요양병원이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몸 가누기도 불편한 어르신들이 한낮에 병원 로비에 얼마나 모이실까 내심 불안하여 나는 미리부터 안절부절 하였다.
 
최소한 입원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음향을 설치하고, 로비엔 최소한의 인원만 조용히 움직였다. 앞으로 공연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아있어 공연단은 리허설을 진행 중이었지만, 병원이라는 특성을 앞세워 자리만 맞춰보고 음향만 점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나 둘 휠체어에 몸을 싣고 로비로 모여드시는 어르신들, 물론 자력으로 움직여 오시는 경우보다는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모시고 와야만 가능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대감이나 들뜬 표정은 하나 없이 그저 오라니까 오고, 밀어주니까 오는 것 같이 보였다. 아프면 만사가 귀찮은 법이고, 나이들면 자리 뜨고 나는 것이 더더욱 싫다시던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짤막한 공연 안내방송이 나왔다. 마이크가 들어오고 하나 둘 제 자리를 잡아가는 스텝들과 공연단, 변변한 대기실이나 피팅룸조차 없어 어린 무용단들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건물과 건물사이 구석진 복도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객석도 서서히 차기 시작했다. 접수센터 앞 소파를 모아 임시 객석을 만들고 거동이 가능하신 분들은 그곳에 앉고, 휠체어 타신 분들은 한쪽으로 자리를 마련해 드렸다. 2층 로비에서 미처 1층까지 못내려오신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박수를 쳤다.
 
오은령무용단 어린 학생들이 고운 부채를 펼치며 음악에 맞춰 등장했다.물론 조명 대신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투명유리창과 무대는 바닥에서 1-2센티 높인 정도라 공연단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 신기하고 예뻤던지 시선을 뺏긴 어르신들께서는 눈을 떼지 않았다. 꼭두각시춤을 추는 앙증맞은 꼬마들에게는 큰 박수를 보내주시며, 때론 객석이 어깨춤으로 들썩이기도 했다.
 
민요를 부르는 가수의 노래 몇 곡이 나가고 돌아보니, 어느 새 웃음 진 얼굴들, 미소 띤 얼굴들, 함께 손을 내저으며 춤을 추시는 분들이 보였다.작은 앵콜도 나왔다.내가 본 관객들 중 가장 소극적이었지만, 가장 감정의 폭이 컸던 관객들이었다.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객석으로 스며들어 어르신들과 호흡하며 손을 꼭 잡아드리자 환하게 꽃으로 피어나는 어르신들은 이미 연세 든 환자가 아니었다.
 
어떤 분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분도, 어떤 분은 까딱까딱 발장단을 맞추시며 리듬을 탔다. 공연 마지막 부분엔 출연자 전원이 객석으로 나가 손을 잡아드리며 함께 노래를 했다. 꼭 잡은 손들이 고사리 손을 어루만지며 놓지 않았다.
 
저 힘은 뭘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때론 큰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 예술의 힘이란 바로 저런 것일 것이다. 수치화할 수 없지만, 분명 큰 에너지가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르신들의 피로도를 고려해 한 시간도 못 되는 짧은 공연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와달라며 서운함을 보이셨다. 점심시간에 맞춰 혹은 물리치료 시간에 맞춰 총총 로비를 떠나시는 환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로비 한복판이 썰물 빠져나간 자리처럼 공허한 것은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소외되어 본 사람은 안다. 손을 뻗어 의지할 지지대가 나팔꽃에겐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얼마나 크고 고마운 존재인지를 ....비단 병원뿐만이 아니라, '찾아가는 작은 무대'가 방문하는 곳엔 따뜻한 정이 넘친다. 관객들은 순수하게 들뜨고 호응하고, 예술인들은 출연료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관객이 보내주는 뜨거운 박수만을 생각한다. 
 

▲ 고경숙(시인/부천예총기획위원) ⓒ부천타임즈

시민과의 소통이란 어쩌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리라. 내가 네가 되어보고, 네가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마주 잡는 손의 온기를 느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문화행사를 치르고 나면 어김없이 평가받는 그 잣대는 관객수와 그 효율성이 적합한 것이겠지만, 정작 행사현장에 나와보지 않고 자료만으로 검증하고 평가하는 전문기관에서 분명 놓치는 부분들은 수치화할 수 없는 예술의 또 다른 알파의 힘, 잠재된 가치에 대한 것들일텐데, '작은' 것이 때론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언제쯤 인정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찾아간다. 시민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피아노가 못 들어갈 좁은 공간이라면 바이올린 하나 만으로도, 덩실덩실 어깨춤 불러낼 수 있는 한 분의 관객이라도 앉아계신다면, 나비처럼 너울너울 헛깨비춤이라도 출 각오로 말이다.

고경숙(高慶淑) 프로필
1961년 서울 출생/네띠앙 인터넷 문학상 대상/수주문학상 우수상/2008년 두레문학상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