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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그시각 그곳에 있지 않았다
[단독취재 ①] 현대비자금 150억 알리바이 물증 발굴
2003년 12월 11일 (목) 00:00:00 부천타임즈 기자 webmaster@bucheontimes.com

기사 및 사진 제공 : OhmyNews

   
▲ 박지원 장관의 알리바이 입증하는 2000년 4월14일 이해랑연극상 시상 및 추모 기념 연극 '세자매' 관람 기념사진. 앞줄 한 가운데 박지원 당시 문광부장관이 앉아 있다. ⓒ 극단 산울림 제공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있는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를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물증이 나왔다.

이 물증과 관련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장관에게 1억원짜리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 150장(총150억원)을 건넸다고 검찰이 지목한 범행 시간에 박 장관은 제3의 장소에서 연극 관람을 하고 출연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확인됐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6월부터 대북송금 특검의 수사결과는 물론, 특검의 수사결과를 인계받아 수사해온 대검 중수부의 현대비자금 사건 수사결과에도 허점이 적지 않다고 판단해, 대북송금 및 현대비자금 사건 수사·공판기록을 입수해 면밀히 검토하고 관련자들을 만나 검증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제3의 장소에서 찍힌 한장의 사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현대 비자금 수수 의혹 사건의 핵심 쟁점은 현대측이 2000년 4월 7일 시중은행의 현대건설 계좌에서 현금 150억원을 인출해 당일 이를 농협 지점에서 1억원짜리 무기명 CD 150장으로 교환해 두었다가, '4월 중순 어느 날'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이를 박지원 장관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검찰에서 "무기중개업자 김영완씨로부터 요청을 받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통해 150억원을 박지원 장관에게 주었다"는 요지로 진술했다. 이익치 회장 또한 "무기명 CD 150장을 박지원 장관에게 건넸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검찰은 현대측이 이익치 전 회장에게 건넨 문제의 CD(150억원) 가운데 일부가 김영완씨를 통해 '돈 세탁'된 사실을 계좌추적을 통해 확인했다.

또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 도피한 김영완씨 또한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보낸 '자술서'에서 자신이 CD 150장을 받아 이를 관리했고 그 일부(20여억원)를 박 장관에게 주었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검찰은 박 장관이 김씨를 통해 현대측에 돈을 요구하자, 김씨로부터 요청을 받은 정몽헌 회장이 이익치 회장을 시켜 박 장관에게 돈을 전달했고, 박 장관은 이를 다시 김씨에게 맡겨 '돈세탁'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박지원 장관은 지난 6월 대북송금 특검 및 이후 대검 중수부의 조사를 받을 때부터 그 이후 12번의 재판을 받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돈 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박 장관은 이익치 회장이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종의 '배달사고'인데, 이는 이익치 회장이 김영완씨와 함께 짜고서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돈을 빼낼 경우에만 가능한 방법이다.

 문제의 날 2000년 4월 14일

우선 대북송금 특검이 물꼬를 튼 현대비자금 150억원 수수 의혹사건의 최대 맹점은 돈을 건넨 당사자인 이익치 회장이 박 장관에게 돈을 건넨 날을 '4월 중순 어느 날'이라고 지목할 뿐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박 장관 변호인측은 검찰이 피고인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없게 하려는 치졸한 수법이라고 비판해왔다.

   
▲ 2000년 4월8일 베이징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박 장관과 변호인측은 특히 2000년 4월 중순 당시에는 박 장관이 그해 4월 10일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함께 반세기만의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해 이를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된 상황임을 강조했다. 박 장관의 얼굴이 모든 신문방송에 크게 보도된 상황에, 서울 시내 호텔의 객실도 아닌 공개된 장소인 호텔 바에서, 이른바 '바이 코리아펀드' 신화의 주인공으로 역시 얼굴이 알려진 이익치 회장을 버젓이 만나 150억원을 수수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냐는 논리다.

더욱이 그때는 4·13 총선이 있어서 박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특사' 자격으로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품은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박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익치 회장의 진술대로 서울 소공동 플라자호텔 스카이라운지 바(토파즈)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면, 누군가 목격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토파즈 바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은 물론 변호인측도 현대그룹 관계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날짜를 특정하는 데 주력해왔다. 검찰은 범죄를 특정하기 위해서였고, 변호인측은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검찰과 변호인 양측은 사실상 모두 2000년 4월 14일을 돈 받은(혹은 돈을 건넸다고 주장하는) 날짜로 지목했다.

왜냐하면 검찰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익치 회장과 이 회장에게 150장을 건넨 김재수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 그리고 김 부사장에게 CD를 건넨 이승렬 현대건설 전무이사 3자가 모두 돈을 건넨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 시점이 '총선 이후'라는 데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 이익치 회장은 돈을 건네고나서 며칠 뒤에 정몽헌 회장이 외국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일찍 박 장관에게 돈을 건넸다고 보고한 것으로 검찰에서 진술하고 있고, 정 회장 또한 외국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 그런 보고를 받은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정 회장은 그해 4월 16일에 귀국했다.

결국 남은 날짜는 16대 총선거 뒤 4월 14·15·16일 3일뿐인데, 15일은 토요일이고 16일은 일요일이다. 따라서 현대측 관계자들의 진술과 증언을 종합하면 토·일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4월 14일밖에 없는 것이다.

   
▲ 자기가 쓰던 휴대폰의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진술한 이익치 회장
이제 남은 것은 이익치 회장이 돈을 건넸다는 시각인데, 그 시각에 대한 진술도 애매하다

사실 1~2억원도 아니고 150억원이라는 거액을 주고받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관련 메모 하나 없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처음에 이 회장은 박 장관에게 150억원을 건넨 날짜나 메모를 수첩에 표시해두지도 않았고, 당일 아침 박 장관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서 박 장관이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변호인측이 통화기록을 추적하기 위해 전화한 휴대폰 번호를 물으니, 이 회장은 법정에서 "당시에는 2∼3개의 핸드폰을 사용했고, 1개월 정도 사용하고 버렸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진술했다. 자기가 쓰던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측은 이익치 회장의 수첩이나 어딘가에 보면 분명히 휴대폰 전화번호는 있을 것인데, 통화기록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진술한 의혹이 있는데도 검찰이 통화기록을 밝혀내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회장은 박 장관을 토파즈에서 만난 시간도 처음에는 밤 10시30분이라고 진술했다가 나중에는 9시30분으로 번복했다. 김재수 부사장이 검찰에서 당일 이 회장이 사는 서울 광장동 아파트 근처에 가서 CD를 건넨 시각을 저녁 8시라고 진술하자, 이 회장은 그 시각을 기준으로 역산해서 박 장관을 만난 시각이 9시30분이라고 진술을 수정한 것이다.

이후 이 회장은 9시30분 약속이어서 8시쯤에 집에서 에쿠스 리무진 승용차를 손수 몰고 출발해 청계고가도로를 타고 가서 시청을 끼고 플라자호텔에 9시15분쯤에 도착해 시간이 남아 승용차 안에서 몇 분간 기다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토파즈에 가서 박 장관을 만나 CD 150장을 건넸다는 것이다. 그러나 택시 기사들은 그 시각에 청계고가를 탈 경우 광장동에서 시청까지는 30∼40분이면 도착한다고 말한다.

알리바이 단서 제공한 <조선일보> 2000년 4월 15일자 기사

'2000년 4월 14일 밤 9시30분 플라자호텔 토파즈 바'라는 형사소송법 상의 범행 일시와 장소를 배척하는 알리바이의 단서는 뜻밖에도 <조선일보> 기사가 제공했다. 이 신문의 4월 14일 밤 인터넷판(15일자)에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해랑연극상 시상식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제10회 이해랑연극상 시상식이 14일 오후 6시부터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려, 배우 겸 연극제작자 유인촌(49·극단 유대표)씨가 트로피와 상금 2000만원을 받았다. 조선일보사와 이해랑연극재단(이사장 이방주)이 주최한 시상식에는 300여명의 문화계-연극계 인사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

시상식에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비롯, 원로연극인 김동원씨, 차범석 예술원회장, 유민영 단국대 교수, 임영웅 극단산울림 대표 등 이해랑 연극상 심사위원과 박웅 연극협회 이사장, 연극배우 박정자·손숙·윤석화 서희승씨, 극작가 조광화씨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시상식에 이어 이해랑연극상 10주년을 기념하고 이해랑 선생 타계 11주기를 추모하며 막올린 연극 '세 자매'를 관람했다."

원래 이해랑연극상 시상식(수상자는 유인촌씨)은 조선일보사에서 열려왔으나 이 해는 10회인 점을 감안해 문예회관 대극장 로비에서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시상식이 끝난 뒤에 바로 이곳에서 이해랑 연극상 시상 10주년을 기념하고 이해랑 선생 11주기를 추모해 공연하는 안톤 체홉의 대표작 '세자매'를 관람한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사고(社告)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는 이해랑 연극상 시상 10주년 기념 및 이해랑 선생 11주기 추모 공연으로 안톤 체홉의 대표작 '세자매'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세자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연극 '세자매'는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박정자(96년), 손숙(97년), 윤석화(98년), 서희승(99년) 등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극단 '산울림'(92년)의 임영웅 대표가 연출을 맡아 격조 높은 감동의 무대를 꾸밉니다. 리얼리즘 연극의 백미 '세자매'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관람 바랍니다.

▲일시 : 4월 30일(일)까지 / 화∼토요일 오후 3시·7시 30분, 일요일 오후 3시
▲ 장소 : 문예회관 대극장

저녁 7시30분에 시작해 밤 10시에 끝난 '세자매' 연극

연출자인 임영웅씨와 출연 배우인 손숙씨 등에 따르면 '세자매'는 휴식시간을 포함해 2시간30분짜리 연극이다. 따라서 공연 시간은 시상식이 끝나고 7시30분부터 시작해 밤 10시에 끝났다.

이제 남은 문제는 박지원 장관이 이날 연극을 관람했냐는 것이다. 10시까지 연극을 관람했다면 박 장관이 그날 9시30분에 플라자호텔에서 없었다는 '현장부재증명'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변호인 중의 한 사람인 소동기 변호사를 통해 문의해보니 박 장관은 시상식에 참석한 것과 연극을 관람한 것은 기억하지만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손숙씨와 박정자씨도 마찬가지였다. 박 장관이 시상식에 참석한 것은 기억나는데, 연극을 관람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었다. 원로 극작가인 차범석 예술원 회장도 박 장관을 시상식에서 본 기억은 나는데 함께 연극을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손숙씨는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연극 공연이 끝나고 공연을 관람한 박 장관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 같다"면서 "혹시 연출자인 임영웅 선생님한테 사진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12월 9일 저녁 일본에서 막 돌아온 임영웅씨에게 전화를 하니 임씨는 그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다른 때는 조선일보사에서 시상식이 있었으나 그때는 연극상 10회 및 이해랑 선생 11주기 추모 공연을 기념해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로비에서 시상식을 했고, 시상식이 끝난 뒤에 자신이 연출한 '세자매'를 관람했으며, 관람자들은 연극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출연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박지원 문광부장관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사진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자는 다음날인 12월 10일 그 기념사진 사본을 입수했다. 사진 속의 박지원 장관은 차범석 예술원 회장과 배우 손숙씨 사이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검찰은 지난 12월 1일 결심공판에서 150억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로 구속 기소한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에 대해 징역 20년에 121억4000여만원을 몰수하고 28억6000여만원을 추징할 것을 구형했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김상균 부장판사)는 오는 12일 오후에 선고할 예정이다.

그러나 검찰의 범죄 혐의 입증을 배척하는 유력한 알리바이 증거가 제시됨에 따라 선고일이 연기되거나 선고유예가 내려질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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