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안윤학 기자    
 

▲ 야누스적인 외모를 지닌 정지은 선수. 곱상한 얼굴은 순수한 소녀지만 상대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은 영락없는 파이터의 그것이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하하하! 다음번엔 더 강하게 내다 꽂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이 몽롱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숨쉬기도 곤란하다. 단지 한수 가르쳐 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심하게 내동댕이칠 줄이야….

순간 링 위에 형편없이 뻗어 버린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본능적인' 부끄러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김진철 블루드래곤 체육관 관장은 자신의 애제자가 선보인 테이크 다운(상대방을 잡고 넘어뜨리는 기술)에 만족한 듯 연신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사각의 링에 널브러져 있는 나는 분통이 터졌다!

'그래도 '남자'이거늘, 어찌 이리 쉽게 벌렁 자빠지나!'

나를 그렇게 내동댕이친 사람은 여성이자 약관의 나이에 '격투기 경력 4년차'라는 범상치 않은 이력을 가진 정지은(59kg 이하급·호원대 스포츠경호학부)씨. 유명세를 날리는 선수는 아니지만, 그에게서는 분명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나를 쓰러뜨린 20세의 여성 파이터

11월 29일 저녁 6시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에 위치한 블루드래곤 체육관. 핏방울 자국이 군데군데 선명하게 찍혀 있는 사각의 링 주위에서는 덩치가 산만한 '사내' 몇몇이 몸을 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정지은씨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다소 야누스적인 외모를 지녔다. 곱상한 얼굴은 그야말로 '순수한 소녀'지만 상대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은 영락없는 '파이터'의 그것이다. 붕대를 감은 발과 봉숭아물을 들인 엄지발가락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선배들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는 말을 자주 해요."

링 위에 올라선 지은씨는 소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전사'로 탈바꿈했다. "펑~펑!" 불꽃축제를 연상 시키는 발차기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키 162cm의 격투기 선수치고는 크지 않은 체구. 하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육상 선수 생활을 하며 다져진, 그가 자랑하는 '튼실한 하체'는 엄청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 링 위에 올라 훈련을 하고 있는 정지은 선수. 하루 2~3시간 훈련에 추가 개인 훈련은 기본이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찮게 접하게 된 격투기는 지은씨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냥 무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다행히 하나뿐인 딸이 격투기에 빠져 체육관에 처박혀 있어도 부모님은 꾸지람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초반에 어머니가 약간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셨다. 아버지도 젊을 때는 안 해 본 운동이 없던 '운동광'이었다고. 운동을 하면서 만난 남자친구도 시합 나갈 때 "다치지만 마"라며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이 펄쩍 뛸 듯이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친구들도 얼마 안가 "자랑스럽다, 힘내라" "역시 너다"며 적극적인 지지자로 돌아섰다.

▲ 지은씨의 튼실한 하체는 어렸을 적 육상으로 다져졌다. 여자라고 얕봤다가는 저 킥 한 방에 당할 수 있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치한과 마주치면? 조용히 인사하고 공격 들어가야죠"

"지은이는 평소에는 내성적이지만 연습과 시합할 때만큼은 매섭죠. 테이크 다운과 타격 능력이 좋고, 상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포기하지 않는 근성까지 갖췄죠." (김진철 관장)

작년 4월 그는 데뷔전이었던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선발돼, 그해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우슈대회에 참가했다. 지금까지 전적은 20전 12승(5KO) 4무 4패.

"으슥한 밤 골목에서 여자를 괴롭히는 치한을 보면 어떻게 하겠냐고요?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왜 괴롭히느냐, 그만해라, 그 말부터 해야겠죠. 그래도 안 되면 '다소곳이' 인사하고 공격 들어가야죠. 길 가다가 누가 시비 걸어도 겁나지 않아요. 열심히 운동해서 전적을 쌓으면 세계대회도 나갈 수 있죠, 무슨 일을 해도 자신감이 생기죠. 게다가 여성들이 고민하는 배와 다리의 살도 잘 빠지죠…."

지은씨의 격투기 예찬은 끝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격렬한 운동을 하다 보니 몸으로 하는 것에는 겁이 없어졌다는 점. 피를 흘리는 것도 별일 아니다.

"운동하다 보면 다치는 경우도 정말 많아요. 그래도 피나면 닦고 다시 운동해야죠. 헤드기어 안 쓰고 선배랑 스파링 하다가 코를 맞아서 처음으로 피를 봤어요. 실수였는데 피를 흘려서 무섭다기보다는 코가 내려앉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렇다고 지은씨가 '피도 눈물도 없는' 주먹만 믿는 '싸나이'가 되어 버린 건 아니다. 격투기를 시작하기 전 지은씨는 굉장한 말괄량이였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나서는 많이 차분해졌다.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운동 덕에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수련하면서 자연스럽게 됐던 것 같다고.

▲ "여자 이종격투기가 뭐 볼 게 있냐고요?" 한국에서 여성 이종격투기가 인정 받는 그날까지 정지은 선수는 뛸 것이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K-1 챔피언이라도 여 선수 셋에겐 못 당할 걸요?

'이종격투기는 남자들의 세계'라는 편견 때문인지 국내 여성 이종격투기 시장은 불모지나 다름없다. 김진철 관장에 따르면, 일 년에 4~5회 열리는 '산타격투기대회'가 정씨 같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출전 기회라고 한다. 그나마 출전하는 선수도 많지 않아 경기를 많이 치를 수 없다. 많아 봤자 서너 경기, 적을 때는 한 경기만 치르기도 한다.

"여자 이종격투기가 뭐 볼 게 있냐"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비아냥도 지은씨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K-1 챔피언 효도르와 세 명의 여자 격투기 선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를 놓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효도르의 손을 들어 줬다. 하지만 지은씨의 견해는 달랐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3명 모두 수준급 선수라면 효도르도 분명 질 거예요. 여자 격투기가 재미없을 거라는 편견은 좀 버렸으면 해요."

여자 이종격투기도 충분히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것. 김진철 관장은 그 가능성을 올해 5월 열린 국내 최초의 여성 종합이종격투기대회 '제1회 코리아 스맥걸'에서 찾았다.

▲ 지금도 링을 밟으면 우선 기분부터 좋아져요. 이기든 지든 즐거운 마음으로 시합하고 내려와야지 하는 생각뿐이죠." ⓒ 오마이뉴스 조경국

"산타격투기대회는 팔꿈치, 무릎 공격이 허용되지 않고 관절기 또한 허용되지 않아서 남자 경기보다 다소 박진감이 떨어지죠. 하지만 스맥걸은 종합이종격투기이기 때문에 남자 경기만큼 긴장감이 감돌죠. 스맥걸은 남자 이종격투기와 똑같은 기술을 쓸 수 있어요. 팔꿈치 외에 모든 기술을 다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비록 지은씨는 올해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내년에 열리는 대회에서는 꼭 1승을 따내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스맥걸에 대비해 타격과 테이크 다운 기술 외에도 브라질에서 건너온 관절기 위주의 '유술'도 배우고 있다. 한창 나이에 꾀를 부릴 법도 한데 그는 2~3시간씩 있는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때로는 밤늦게까지 개인 연습을 하기도 한다. 케이블 티브이에서 하는 일본 이종격투기 대회인 '케이원'이나 '프라이드'도 열심히 챙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취미로 했는데 계속 시합에 나가다 보니까 모든 경쟁자들을 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어요. 최고가 되는 거죠. 우선은 다시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게 목표예요. 올핸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국가대표로 뽑히지 못했거든요."

"절 경계하지 마세요!"

그는 스무 살 어린 아마추어 선수지만 마음만은 이미 프로다.

"첫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승리를 따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기장에 올라서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죠. 지금도 링을 밟으면 우선 기분부터 좋아져요. 이기든 지든 즐거운 마음으로 시합하고 내려와야지 하는 생각뿐이죠. 여자가 격투기하는 걸 무섭게만 보지 말고, 편하고 재미있게 봐 줬으면 해요. 저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여자라서 약해요~"라는 그의 말은 믿지 마라. 그랬다가는 나처럼 보기 좋게 나가떨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