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공 : 오마이뉴스

유럽의 중심도시를 거닐다 문득 느끼는 점은 간판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딘가를 찾아가는데,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긴 옛 건물들이 대부분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마당에 현대식 간판은 어울리지도 않고 필요도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

▲ 브뤼셀의 레이스가게 간판 ⓒ2003 조미영
▲ 1898이란 숫자가 역사를 알려준다. ⓒ2003 조미영

오스트리아의 찰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로 유명한 관광도시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도시가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중심가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들 때문이다.

상점마다 자신들의 업종을 알기 쉬운 형상으로 만들어 간판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과거 글을 모르는 이들도 그 곳에서 뭘 팔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한다. 이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이젠 이런 문화자체가 하나의 볼거리가 되어 많은 이들을 이 거리로 끌어들인다.

▲ 찰츠부르크의 게트라이데 거리 모습, 조그만 막도널드의 간판도 보입니다. ⓒ2003 조미영     ▲ 가위와 머리빗 형상으로 이 곳이 머리를 손질하는 곳 임을 알려 줍니다. ⓒ2003 조미영

 전세계에 체인점을 갖고 일률적인 대형간판을 내세우던 맥도널드조차 이 거리에서는 조그마한 모형간판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시를 호헨찰츠부르크성(일명 "소금의 성")의 은은한 불빛이 감싸안으며 비춘다. 아름답다.

그 외에도 여행을 하다보면 사람들마다 "그 곳의 야경을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하성의 야경,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에서 보는 야경, 런던의 타워 브리지 야경, 파리의 에펠탑 야경 등등 멋있는 야경이 왜 그리 많은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여행 선배들이 추천한 모든 야경을 쫓아다녔다. 그런데 야경을 쫓아다니다 보니이들 야경이 멋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이들 야경을 방해할만한 거슬리는 광고물들이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 건물들과 불빛들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한다. 야경의 주인공이 되는 상징물들 역시 상업적인 건물이나 광고사인들이 빚어내는 화려함이 아니라 도시를 상징하는 역사적 기념물들이 뿜어내는 기품이었다.

▲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본 야경 ⓒ2003 조미영

그 후로 종종 거리에서 놀랄 만큼 재미있고 멋있는 간판을 마주할 때면 사진에 담아 보았다. 꽤 많은 양이었다. 이럴 때면 좋은 미술품을 본 것만큼 기분이 좋아진다.

▲ 폴란드 바르샤바광장의 이색 갤러리 간판! ⓒ2003 조미영     ▲ 폴란드 쿠라코우시의 식당간판! ⓒ2003 조미영

문득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을 빠져 나오고 있었을 때였다. 여행의 피로 탓이지 꾸벅꾸벅 졸다가 비몽사몽 내다본 차창 밖 너머의 풍경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형형색색의 전등으로 둘러친 성과 궁전들이 다리 너머 저편에 하나의 왕궁을 조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날 밤 본 홍콩 빅토리아 피크의 야경이 떠올랐다. 사실 '100만불 짜리 야경'이란 명성에 기대를 했던 탓인지 적지 아니 실망했었는데 지금 보는 이 휘황찬란한 한 무리의 조명들은 그에 못지 않게 화려함을 뽐내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차가 점점 접근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선명하게 들어오는 글씨들이 보였다. 그것은 'HOTEL'과 '모텔'이라 적힌 네온사인과, 경쟁적으로 더 잘 보이기 위해 위로위로 솟구쳐 오른 온갖 형상의 불빛들이었다.

▲ 프랑스의 카페, 요란한 간판대신 진열장의 그림으로 역사와 명성을 대신합니다. ⓒ2003 조미영

어디 그 뿐인가? 요즘은 도시의 간판들을 보며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쩜 저리도 큰 간판을 달아 맬 수 있는지? 그곳도 모자라 업소 앞에 세워둔 흔들거리는 대형 입간판들이 인도를 점령하고 건물전체가 간판에 뒤덮여 버리는 일쯤은 당연하다. 또한 밤이면 이런 간판에 조명까지 더해져 동네가 온통 나이트클럽 분위기로 번쩍거린다. 그 커다란 간판들 사이에서 정작 갈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 이런 입간판은 애교스럽습니다! ⓒ2003 조미영

광고는 튀어야 한다지만 요즘같이 너나없이 튀는 세상엔 오히려 우리의 좁은 땅덩어리와 자연에 걸 맞는 차분한 모습이 더 돋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 고서점인 듯한 이 입구 앞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춰 선 느낌입니다. ⓒ2003 조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