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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 지금 우리 사회를 말하다
2005년 02월 20일 (일)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오마이뉴스 : 이동원 기자 

   
▲ <그때 그사람들> 포스터 ⓒ2005 MK
25년이 걸렸다. 18년 5개월에 달했던 그의 집권기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암흑의 시대'로 불린 유신 7년 만큼의 세월이 또 흐른 것이다.

그러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개봉은 쉽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가 지난 1월 10일 영화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낼 때까지만 해도 그로 인해 더욱 관심을 끌게 되자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란 의견들도 제법 많았다. 또한 근래 들어 개봉을 앞둔 영화들에 대한 명예훼손 시비 등은 있어왔지만 실제 사법부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제약을 가한 경우는 없었던 것도 이런 '낙관적' 추측을 거들었다.

하지만 1월 31일 서울 중앙지법이 박지만씨가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영화 앞뒤에 삽입된 다큐 필름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는 판결을 내리며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개봉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내려진 법원의 사실상 '검열'에 제작사인 MK픽쳐스(대표 이은)는 고육지책으로 삭제를 받아들였다.

이미 국내 최대의 영화 투자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개봉을 불과 일주일여 남겨둔 지난 1월 26일 전체 제작비의 20%선이던 투자금 10억원을 회수하기로 결정하고 돌연 영화의 배급까지 포기해 버려 급작스럽게 자체 배급에 나섰던 제작사에게, 법원 판결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다.

역사를 버릇없고 무책임하게 다뤘다?
한편 <조선일보>는 판결 이전부터 영화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보여왔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를 통해 각성이나 감동을 얻을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웬만한 영화리뷰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들이 이어진다.

"금기의 소재를 미진한 블랙코미디로 낭비해버린 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다." "이 영화의 최대 악덕은 민감한 내용을 강하게 다뤘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버릇없고 무책임하게 다뤘다는 점이다."(냉소주의로 재구성한 '10·26'- <조선일보> 1월 25일자)

법원의 '검열'이 '보수신문 작품'이라고 말한 임상수 감독. 그는 법원 판결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울중앙지법의 결정으로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미학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직격인터뷰] 임상수 감독...- <프레시안> 2월 1일자)

CJ엔터테인먼트의 갑작스런 배급 철회 또한 흥행을 결정짓는 개봉 초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배급사가 바뀌면서 혼선을 빚은 탓에 서울 42개 스크린, 전국 193개 스크린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나마도 좌석수가 적은 관들이어서 매진을 기록해도 그 수치는 '말아톤'이나 '공공의 적2'의 매진에는 한참 못 미친다."(영화 '말아톤'...- <연합뉴스> 2월 11일자)

지난 1월 24일 열린 시사회에서 "역사를 이렇게 단죄할 수 있느냐"며 "20년쯤 지났어도 편안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던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의 말대로라면 대략 반백년쯤은 지나야 된다는 논리지만 옥석에 대한 평가를 떠나 영화 하나 개봉하기가 이리도 힘든 게 현실인가. 대통령이 여섯 번이나 바뀌며 사반세기가 흘렀는데도 말이다.

   
▲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김부장 역을 맡은 백윤식. ⓒ2005 MK픽쳐스

“박정희 모욕했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근래 보기 드문 역경 끝에 개봉된 영화 <그때 그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안가에 마련된, 여가수와 여대생이 포함된 술자리에서 동석한 최측근에게 총을 맞아' 사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대통령이 시찰하는 주요 행사에 헬기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밀려난 중앙정보부 김부장(백윤식 분)은 돌아온 대통령이 안가에서 만찬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행비서 민대령(김응수 분)과 궁정동 안가로 향하지만 만찬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건방진 경호실장(정원중 분).

참기 힘든 경호실장을 뒤로하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선 김부장은, 여자 '손님' 섭외하랴 뒤치다꺼리하랴 하루하루가 짜증나는 의전 담당 주과장(한석규 분)과 민대령을 부른다.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을 부른 김부장은 눈빛을 번뜩인다. "오늘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중견배우 송재호가 연기한 극 중 박정희 캐릭터에서 의도적인 비꼼이나 깎아내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도 "(캐릭터가) 매우 나이스하게 느껴진다"는 질문에 "(배우에게) 우아하면서도 나이스하게 보여달라"고 요청했다며 "이 영화에서 박정희씨를 모욕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프레시안> 위 기사).

법원의 시대착오적인 판결과 일부 언론들의 마구잡이식 흠집내기 등으로 인해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무슨 무슨 장면이 어떠하다'는 등의 '비상식적'이고 '비생산적'인 쪽으로만 쏠리다 보니 실제 영화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있는 분석이나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10·26이 있기까지 정국상황이 중요한 이유
그렇다면 10·26을 둘러싼 당시 실제 정국상황은 영화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10월 26일은 시간상으로는 24시간에 불과하지만 10·26이 있기까지의 일련의 정국흐름은 10·26과 <그때 그사람들>의 관계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말기로 치닫던 박정희 정권은 점점 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 사실의 왜곡 전파 행위를 금지하고,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또는 폐지를 청원 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수업, 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를 금지하고, 이러한 조치에 대한 비방 등을 금지하고, 이러한 금지를 위반한 내용을 방송, 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소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위반 당시의 소속 학교 단체 사업체 등에 대해 제재 휴교 폐간 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책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2>, 276쪽, 박세길 씀, 1989, 돌베게)

1975년 5월 13일, 유신 이후 이성을 잃어가던 박정희 정권이 발동한 '악명높은'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이다.

   
▲ 김부장의 오른팔 주과장 역을 맡은 한석규 ⓒ2005 MK픽쳐스

그러나 긴급조치의 '악명'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전대미문의 긴급조치 9호는 민주진영의 반독재투쟁을 일시 주춤거리게 만들었지만 그러한 폭압 하에서 목숨을 건 항거를 계속해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위 책, 277쪽)

1977년 9월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1973년 5월에 설립된 청계천 일대 노동자들의 배움터인 '노동교실'을 강압적으로 폐쇄하려는 당국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던 '노동교실 사수 투쟁', 그해 10월 이에 고무된 해직교수들의 진출, 다음해 중앙정보부 및 경찰과 연합한 사측의 노조파괴에 맞섰던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 농협측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시작된 시위와 농성이 다수의 민주인사들이 동참하며 정부의 탄압정책을 널리 폭로하는 선전활동으로 발전했던 '함평 고구마' 사건 등.

노동자, 농민들의 처절한 투쟁은 표면적으로 잠시 고요해 보이던 정국에 불을 당겼다.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결사적 투쟁에 고무되면서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일시 위축되었던 투쟁력을 급속히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과감한 행동을 펼치게 되었다."(위 책, 281쪽)

1979년에 접어들자 이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이 임박했음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다양한 민주화운동세력들은 서로 세를 규합해 가고 있었고 그해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한하자 미국을 규탄하는 투쟁이 거세게 벌어지는 등 민중들의 분노는 양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발전하며 폭발 직전의 임계 상태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유신독재도 1979년에 이르면 YH무역 신민당사 농성 강제해산과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에서 보듯이 제도권 야당마저 철저히 유린하는 말기적 탄압을 통해서만 겨우 지탱이 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시달릴 대로 시달린 국민들의 염증과 분노도 깊어져만 갔다."(1970~90 현대사 재조명 실록...- <경향신문> 2003년 12월15일자)

유신철폐 시위에 비상계엄령 선포
그해 여름까지 달구어진 민중들의 분노는 가을에 이르러 급기야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0월 16일 부산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부산시청 앞에 집결한 부산대, 동아대생 3천여명이 중심가를 휩쓸면서 시위를 진행하여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경찰이 무차별하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시위 학생들을 난폭하게 구타하자 그에 분개한 시민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위 책, 284쪽)

"밤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는 남포동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찰을 포위해 순찰차와 작전차를 불태웠으며, 3만~5만 인파의 장엄한 행렬이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위 기사)

"부산의 민중들은 독재권력의 말초신경에 해당하는 파출소, 신문사 등에 투석하고 경찰차를 불태워 없애 버리는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같은 투쟁은 자정이 넘도록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위 책, 284쪽)

이튿날인 17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는데 이제 불어나는 대열은 거의가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미국문화원 앞에서 제2관구사령관의 지프와 호송차를 습격하기도 했다. 다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틀간의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방화되고, 학생 시민 1058명이 연행되어 이들 중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위 책, 284쪽)

계엄령이 선포된 뒤에도 부산 시민 2천여명은 시위를 감행했다. 공수부대의 대검을 꽂은 M16이 시민들을 겨누자 부산에서의 횃불은 마산으로 타 번졌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는 회사원 김종권(37)씨. 그는 부마항쟁 당시를 기억했다.

"북마산 파출소는 몇 차례나 습격을 받았어요. 매일 불에 탔죠. '폭도들이 날뛰니 해지면 나가지 말라'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지만, 밤이고 낮이고 참 대단했었죠."

18일 오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남대와 마산대생들을 필두로 마산의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 등을 부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일 정도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다음날인 19일 저녁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해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는 20일을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위 기사)

비상 계엄령이 선포된 18일 새벽 2시 부산 국제시장 뒷골목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대거 가세해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시위모습에 당혹해했다. 그날 청와대로 돌아온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부산의 상황을 보고했다.

"체제에 대한 저항과 불신으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5대도시로 확산될 조짐이 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이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4월4일 방송)

민중의 힘을 담지 못한 <그때 그사람들>
대규모 시위대에 대한 발포까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 긴급조치 9호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압수단을 동원했지만 유신정권의 통제력은 이제 바닥이 드러나 버렸고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이렇듯 박정희 정권은 폭압을 뚫고 분출하는 민중의 항거로 붕괴 직전의 상황이었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10월 26일 하루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바로 이점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임상수 감독은 영화 앞부분에 부마항쟁 당시 다큐 필름을 삽입함으로써 배우들을 10·26 직전의 상황을 펼쳐 보여주는 병풍 앞에 세우려 했지만 법원의 삭제판결로 이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를 두고 '대규모 희생을 막기 위한, 민주화에 기여한 거사냐', '붕괴 직전 폭압정권 내부에서의 자중지란이냐'의 논란을 떠나, 김재규의 방아쇠를 실질적으로 당긴 건 그의 검지손가락이 아니라 '폭압을 뚫고 거대하게 분출하는 민중의 힘'이라는 점을 영화는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바로 이점이 <그때 그사람들>이 가지는 첫번째 아쉬움이다.

   
▲ ⓒ2005 MK픽쳐스

영화 속 궁정동 안가. 먼저 시작한 대통령과 경호실장, 조금 늦게 온 정보부장이 앉자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텔레비전을 보던 대통령, 미 대통령 카터의 얼굴이 나오자 입을 뗀다. "쟌 세상 물정을 몰라도 느무 모린다."

미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5년 9월 7일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온건하고 보다 민주적인 정권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보도한 바 있으며, 그레그 전 CIA 한국지부장도 1976년 12월 23일 같은 신문을 통해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선출된다면 6년 임기를 살아서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위 방송)

족집게였다. '온건'하고 '민주적인 정권'을 바라는 듯한 표현도 CIA와 중앙정보부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역대 CIA 한국지부장은 중앙정보부장과 국군보안사령관을 정기적으로 접촉하여 왔는데 특히 중앙정보부장을 한 달에 두세 번 만나 온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양대 권력기구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과 보안사령관과 CIA 지부장과의 회합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미국의 남한 정책 전반이 거론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책 <국가안전기획부> 195쪽 참조, 조갑제 씀, 1988, 조선일보사- 위 박세길 책 116쪽에서 재인용)

미국 CIA와 중앙정보부의 결속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온 것은 1958년 한미 양국간에 체결된 '군사정보교환협정'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미국의 남한에 대한 개입시 군과 정보기관은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과 CIA한국지부장도 남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위 박세길 책 116쪽)

다시 궁정동 안가. 대통령과 경호실장, 정보부장을 바라본다. "CIA 다녀왔다며?" 시큰둥한 정보부장. "걔네들 하는 얘기가 다 그렇죠."

미국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미 국무부 문서 'SEOUL12003'(1979년 8월 7일)을 보면 미국은 김재규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 관료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가령, 법무부장관은 상대적으로 뻣뻣했고 중앙정보부장은 덜 뻣뻣했다." 미국은 한국의 관료 가운데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김재규라고 판단했다.(위 방송)

암살 하루 전날인 25일, 몇 개월 전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베시 육군참모차장은 아시아협회 주최의 만찬회에 초청되어 '한미- 발전하는 파트너십'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여기서 연설 후반부의 발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대한관계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현재의 대한 협력관계를 냉전의 유산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고, 모두에게 장래의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생각해야 한다."(위 책 286쪽)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루 전의 발언치고는 그 구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해서 그날 밤 이 만찬회에 초대되었던 퇴역군인인 재미한국인 실업가는 '지금 생각하면 베시 장군은 박 대통령의 신변에 무언가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고 회고하였다."(위 책 286쪽)

'미국의 대리정권 말 바꿔 타기' 비켜가
영화의 후반부, 대통령 사망 후 용산 육군본부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 '각하가 어쩌다 그렇게 되셨냐',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며 법전이며 자료를 뒤적이고 목청을 높이는 국무위원들의 소란을 잠재우는 정보부장의 한마디. "글라이스틴을 만났습니다."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 국무위원들의 시선은 김부장의 입으로 쏠린다. 김부장이 내뱉는 말. "원래 미국은 대통령을 안 좋아했습니다."

10·26 직후인 11월 19일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본국에 보낸 문서 'SEOUL17592'.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김재규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이 문서에도 의미심장한 대화가 담겨있다.

"지금 한국정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김재규의 물음에 글라이스틴은 답한다. "한국정치는 양극화될 위험이 있고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 헌법과 정치조직으론 평화적 정권이양이 어려울 것입니다."

제임스 영 전 미대사관 무관도 "비공식적으로 박 대통령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 지 우리끼리 논의하곤 했다"며 그 내용은 '사임' 또는 '유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했다는 것이다. 한편 재미언론인 손충무씨는 인터뷰를 통해 "지미 카터는 1979년 9월 중순경 한 모임에서 '박정희 정권은 제거되야할 악마의 정권'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위 방송)

영화의 끝부분, 국무회의를 지휘하던 김부장은 불과 얼마 뒤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데, 특수유리 건너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심문을 지휘하는 모 장군역의 배우가 뒤통수만 보여주며 등장한다. 머리가 벗겨진 그가 비아냥거리며 부하들에게 던지는 대사. "저 또라이, 저게 혼자 총질하고 지랄한 거 맞제?"

두번째 아쉬움. 그것은 <그때 그사람들>이 '왜'에 대한 시원한 답을 주지 않고 있음에 대한 다른 여러 분석들이 지적해주고 있다. 영화는 '정권핵심부의 권력욕 때문에 무고한 관련 인물들이 희생됐다'는 데 주목하느라 미국과의 관계와 미국의 '개입'에는 김부장이 내뱉는 대사 몇 개를 할애하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미관계의 역사는 미국의 한반도 개입전략의 역사라 할 만하다.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흐름으로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예상한 미국. 더 이상 민중의 분출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 정권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보면서, 이승만을 끌어내림으로써 상황의 호전 또는 관심과 항쟁의 동력 분산을 노렸던 그들의 전례가 떠오르는 것을 왜일까. 결국 미국은 '제 손에 피 안 묻히고 대리정권의 말을 갈아탄' 격이 되었다.

   
▲ ⓒ2005 MK픽쳐스

한국영화사에 용기있는 첫발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김재규의 방아쇠를 당긴 건 민중의 힘'이었다는 점과 '미국의 대리정권 말 갈아타기'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몇가지 부족점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지만 아직 완전히 바뀌지 못한 덕에 심한 홍역을 앓고 절름발이로 개봉된 <그때 그사람들>은,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가 아닌, 비록 25년만이지만 두둑한 배짱으로 용기있는 첫발을 내딛은 공로로 한국영화사에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10·26 당시 텔레비전을 통해 장례식 장면을 보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임상수 감독의 탄탄한 연출과 대사가 있는 배역만 70여개라 감독이 특히 배우 캐스팅에 공을 들여서인지 한석규, 백윤식, 송재호를 비롯한 많은 중견배우들이 보여준 농익은 호연에도 박수를 보낸다.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에는 미국의 개입과 그것을 차단하려는 민중들의 각성과 분노가 공존했다. 10·26 이후에도 민중들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불굴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미국의 개입은 많은 희생과 시간을 지연시켜왔다.

근래에만도 미 의회조사국 래리 닉시 선임연구원의 입에서 시작되어 정국을 뒤흔들었던 이른바 '대북송금비리',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게도 유사한 수를 구사했던 '탄핵' 카드 등 미국의 개입은 세기를 넘어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급기야 올해에는 미 부시 정권의 싱크탱크인 기업연구소(AEI)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선임연구원의 입을 빌어 차마 참아내기 어려운 망발을 뱉어내고 있다. "한국 친미정당과 신문에 자금을 대면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니. 2월 들어서는 딕 체니 부통령과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까지 내세우는 등 공식, 비공식 루트를 총동원해 인도적인 차원의 대북 비료지원마저 중단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의 개입을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바로 이 지점이 영화 <그때 그사람들>과 영화를 둘러싼 한국사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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