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기자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입춘(立春)이 지나니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 시작했다고 꽃 소식이 하나 둘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봄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동토를 뚫고 피어나는 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침 7시.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봄꽃을 마중하기 위해 아직은 찬바람이 부는 캄캄한 어둠을 뚫고 집을 나섰습니다. 혹시라도 애써 오는 봄맞이를 하지 않으면 봄이 늦게 올까 하는 노파심도 있고, 내 마음에 남아있는 겨울을 씻어버리기 위해 오늘 하루 만큼은 제주 땅 어딘가에 피어있다는 세복수초를 만날 작정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아직 산은 흰눈 속에 덮여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설련화(눈 속에서 피어난 복수초를 가리키는 말)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폭설 속에 오던 봄이 뒷걸음질을 쳤는지 4시간 이상 눈이 쌓인 숲 속을 찾아 헤매도 세복수초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날이 개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 반가움에 하늘을 바라봅니다. 눈이 녹은 양지바른 곳에 세복수초의 흔적들이 하나 둘 드러나 있습니다. 설련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봄이 왔다는 증거니까요.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자기를 짓누르는 바위틈, 나뭇가지를 마다하지 않고 복수초들의 힘찬 기지개가 시작되었습니다. 폭설이 내리기 전에 핀 것들은 짓물러버렸지만 따스한 봄바람과 햇살에 눈이 녹아 내리면서 잠자고 있던 그들을 재촉하며 깨웠는지 아직은 귓볼이 벌겋게 되도록 추운 그 곳에 세복수초가 화들짝 피어날 준비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 봄이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계속 될 것만 같던 겨울이 가는 증거를 눈으로 확인을 하는 순간 내 마음 한 켠에 있던 겨울이 부르르 떨며 도망을 칩니다.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작은 등불을 켠 듯한 세복수초.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듯이, 이 작은 한 송이의 꽃이 봄을 일으킬 것입니다. 무엇이든 시작은 작고 미약합니다. 그러나 그 작고 미약한 것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펴면서 더 이상 작지도 않고 미약하지도 않은 물결이 되어 강물처럼, 바다처럼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작다고 실망하고 약하다고 실망하던 마음에 힘을 줍니다.

'실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 맨 처음에는 그렇게 작고, 약한 법이니...'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옹기종기 모여 노래를 부르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서 이내 그들이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지난 겨울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추운 겨울, 그저 그렇게 땅 속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새 봄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새순을 내고 꽃을 피우길 참 잘했다고 노래를 하는 듯 합니다.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하루 이틀 지나면 이들은 더욱 더 화사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비썩 마른 숲 속을 홀로 노랗게 물들이고 있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하얀노루귀와 분홍노루귀, 봄바람에 춤을 추는 바람꽃, 파스텔톤의 현호색과 푸른 새싹들이 하나 둘 수채화물감을 풀어놓듯이 온 숲을 물들여갈 것입니다. 그럴 즈음이면 마른 나뭇가지는 잔뜩 물을 먹고 푸릇푸릇 연한 싹들을 내겠지요.

꽃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도 긴 시간이더니 꽃들을 만나니 왜 그리 하루해가 짧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아직은 완연한 봄이 아니라서 양지바른 곳에서만 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련화를 찾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것들과 눈맞춤을 하면서 봄을 알리는 보춘화(춘란)의 푸릇푸릇한 새싹도 보았고, 재미있는 이름의 개구리발톱 이파리들도 만났고, 지난 여름 하얗게 피었다가 쥐똥처럼 까만 열매를 다닥다닥 맺고 있는 쥐똥나무의 열매도 만났습니다.

세복수초를 만나러갔던 길에 덤으로 만난 것들입니다. 그렇게 그들과 눈맞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의 삶을 돌아봅니다.

▲ 2005년 2월 5일 ⓒ2005 김민수

어떤 것을 선택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하루로 전개되는 것을 봅니다. 그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무엇인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통합니다. 그래서 그 선택과 포기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의 별들이 빛납니다.

세복수초의 기지개. 그들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나도 그 누군가에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은 꽃들처럼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