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타임즈

기우는 동그라미
차주일

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고
한 가문을 지켜 주는 부적도 그려지겠다.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싹을 내어주고 텅 빈,
씨앗 껍데기 같은 둥근 선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았다.
모성 쪽으로 기운다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자니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다.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
양력을 앞세우고 뒤따라가고 있다.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
어머니의 눈까풀도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내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
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 흉내를 내며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 둔 적 있지만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만 보일 뿐이어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고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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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신 어머니 아버지가 사용하는 "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라서 달력을 안 본 지도 꽤 오래되었건만, 부모님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면서 아침을 시작하고 저녁을 마감하는 아날로그 정서에 여전히 충실합니다. 달력에 그려놓은 동그라미들이 하도 많아서 그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해보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습니다.

가족 별자리 안에 큰아들네 별자리가 밝게 보이고 막내딸네 별자리도 환하게 보입니다. 그 주변으로 은하수처럼 잔잔하게 물결지며 번지는 손주들 별자리도 은은하게 보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별자리는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 자리 꿋꿋하게 차지하면서 빛나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별자리지만 부모님에게는 아주 잘 보이는 별자리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형제들 별자리와 사촌 형제들의 별자리,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각각의 친가와 외가의 별자리들은 달력에 표시를 하지 않아도 마음속 달력에 희미하게나마 빛을 잃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그 많은 별들을 이리저리 다 연결하면 "한 가문을" 든든하게 "지켜 주는 부적도 그려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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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부모님이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습니다. 마치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고 키워낸 어머니의 빈 젖처럼 "싹을 내어주고 텅 빈" 동그라미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찌그러져 있는 것이지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 "씨앗 껍데기 같은 둥근 선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은 서로 어울려야 정다운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 두 개의 동그라미조차도 어찌 그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는지 슬며시 웃음이 나네요. 이러다가 별들은 "모성 쪽으로 기운다" 별자리 학설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는 다소곳한 모양새를 보자니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라는 말이 확실히 맞는 모양입니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양력을 앞세우고 뒤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데 "눈까풀"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읽다가 어느 순간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달력의 동그라미가 어머니 가슴에 찍어놓은 자식 이름의 인감도장도 되고, 자식을 위해 비는 정화수 그릇도 되고 그 속에 비치는 자식의 얼굴도 되기에, 그것을 읽은 어머니의 눈이 그리움에 아득해지면서 찌그러지는 것입니다.

자식인 나도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덕분에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 둔 적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그 동그라미가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로만 보일 뿐이어서, 그 정도로 깊고 밝지 않은 겉모양만의 눈을 가지고 있을 뿐이어서, 부모님보다 새끼들 위주로 본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나 자신을 두 눈 질끈 감은 채로 합리화시켜 버리고 맙니다. 아직도 별 하나 제대로 띄우지 못한 깜깜한 마음인 이유입니다.

어머니의 찌그러진 눈과 질끈 감아버린 내 눈은 과연 그 어미에 그 자식일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닮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지만 수많은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는 그런 어색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짐을 지고 있는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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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런 사연에 이번 추석 명절 연휴의 사연도 들어가 있을까요. 코로나를 핑계로 오지 않은 자식들의 동그라미는 달력 속에서 여전히 뚜렷한데 어머니 마음속 동그라미는 그리움에 흐물흐물, 물에 불린 황태 살들이 불어나듯 그렇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또 다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시겠지요. 동그라미를 하나하나 그리면서 어머니 마음속 별자리를 환하게 밝히시겠지요. 어머니 마음속에는 우주의 별들보다 더 빛나고 더 아련한 별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자식인 저도 아이들 얼굴이 서서히 동그라미가 되어 제 마음속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어머니, 어머니가 점지한 다음 동그라미 별자리가 빛나는 날에는 꼭 찾아뵐게요. 그때까지 어머니가 만든 별자리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을 더욱 찬란하게 밝히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경

▲ 시인 이종섶

남 하동에서 태어난 이종섶(시인,평론가)은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부천타임즈 <이종섶의 詩장바구니> 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