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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72] 흉터로 남다
2020년 07월 27일 (월) 12:46:52 이종섶 mybaha.naver.com
   
▲ ⓒ부천타임즈

흉터로 남다
안영선

꽁꽁 동여맨 실을 풀어내자
귀밑으로 햇살을 담은 금이 생겼다
빛의 각도를 따라 만들어지는 힘의 이력
수술대 위에서 신체의 한 부분을 슬쩍 걷어 가던
메스는 날카롭게 웃고 있다
한 줌의 종양 덩이가 뿌리를 드러내자
움츠렸던 어깨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힐긋힐긋 스쳐 가는 골목길 사내들이
시선을 재빠르게 걷어 감추는 것도
숨어있던 낡은 두려움이 잘려 나간 때문이다

흉터를 걱정하는 아내를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한 줌의 살덩이를 도려내고 얻은 생이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가볍다
작은 아이가 떠 준 모자를 쓸 때도
귀밑을 살짝 드러내는 것은
처음으로 몸에 새긴 타인의 흔적 때문
한때 흉터가 문신으로 남기를 기도한 적이 있다
이 음영 진 자국에 겸손해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딸아이의 졸업식 소식이 가까울수록
흉터가 흐릿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문득 든다

   
▲ ⓒ부천타임즈

흉터는 불편합니다. 과거에 힘들었거나 괴로웠던 기억을 그대로 떠올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흉터를 감추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 흉터의 근원이 더욱 깊고 고통스러웠던 것일수록 그 흉터를 꼭꼭 감추고 싶은 것이 대부분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영선 시인은 "한 줌의 종양 덩이"를 떼어내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으면서도, 수술 자국의 흉터를 감추기 위해 "작은 아이가 떠 준 모자를 쓸 때도/귀밑을 살짝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도, 더군다나 그 흉터의 위치가 복부나 가슴처럼 온전히 감출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에 걱정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는 두상의 흉터인데도, 그런 흉터를 지닌 사람답지 않게 참 밝은 시선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귀밑으로 햇살을 담은 금이 생겼다"라는 시선과 "빛의 각도를 따라 만들어지는 힘의 이력"이라는 단단한 표현이 그렇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신체의 한 부분을 슬쩍 걷어 가던/메스는 날카롭게 웃고 있"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웃음은 그 메스를 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메스를 보면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고 웃음을 느꼈다는 것이 정말 밝고 따뜻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 ⓒ부천타임즈

"흉터를 걱정하는 아내를 보면/자꾸 웃음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 줌의 살덩이를 도려내고 얻은 생이/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가"벼워지기까지 합니다. 자기 "몸에 새긴 타인의 흔적"인 흉터에 관해 이런 자세를 가지다 보니, "흉터가 문신으로 남기를 기도한 적이 있다"고까지 하는 말이 더욱 진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음영 진 자국에 겸손해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울림이 전달됩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까지 가졌다는 사실은 그 마음의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어 흐믓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안영선 시인의 시선과 마음으로 흉터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옭아매는 흉터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흉터가 아니라, 그 흉터가 "햇살을 담은 금"으로 보이면서 마음까지 "겸손해지는" 흉터로 작용하게 될 때, 그 흉터는 이제 더 이상 흉터가 아니라 "자랑하고 싶은" 그 무엇의 훈훈한 훈장이 될 겁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딸아이의 졸업식 소식이 가까울수록/흉터가 흐릿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문득 든다"고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소박한 마음을 표현했는데요. 아마도 딸의 졸업식 날에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인해 몸까지도 따듯하고 붉어져 그 흉터가 드러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부천타임즈

따뜻한 사랑의 날에는 흉터가 감춰졌다가 겸손이 필요한 날에는 흉터가 가만히 드러나 기도하게 되는 흉터의 비밀은 "빛의 각도를 따라 만들어지는 힘의 이력"에 있습니다. 오늘도 햇살 앞으로 나아가 빛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이 흉터가 햇살을 닮아가기를. 이 흉터에 빛이 담기는 나날이 되기를.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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