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0.7.9 목 16:21
,
   
+ 로그인 독자회원가입 전체기사 기사모아보기 보도자료
> 뉴스 > 문화/예술
       
[이종섶의 詩장바구니-66] '하늘 우체국'
2020년 06월 15일 (월) 17:09:05 이종섶 mybaha.naver.com
   
▲ ⓒ부천타임즈

하늘 우체국
이병철


하늘 우체국에 가본 적 있다
구름이 치는 전보 속에서는
깨알빛 새들이 시옷자 날개를 펴고
텅 빈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우체국을 품고 있는 산맥의 품에서
연필심이 수런수런 피어올랐다
만년설 아래에도 흑연이 숨어 있을까
투명한 결정들이 지면을 이룬
거대한 엽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 깜빡이듯 낮과 밤이 바뀌는 동안
사람과 산양들이 서툰 글씨로
저마다의 사연을 기록해둔 곳
잉크 자국조차 가물가물한 설원엔
펜혹을 닮은 바위들만 솟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알프스를 사서는
그 뒷면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마을까지 퍼지지 못하고
바람에 증발되는 목동의 노래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일까
눈 삼키다 멈춰선 제설차의 기침을
옮겨 적을 수 없었다, 그때
해발 3,500미터의 쓸쓸한 우체국*에서
네가 있는 서울 반지하 주택까지의 거리가
크레바스보다 더 움푹 팬 흉터로 아려왔다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엽서 위에
긴 문장을 적듯 천천히 우표를 붙였다
유리창에는 서리가 적어 놓은 주소가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우체국이 있다.

   
▲ ⓒ부천타임즈

시 밑에 있는 각주를 보니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우체국이 있"네요. 그 우체국을 "하늘 우체국"이라고 이름 지어 쓴 시 한 편에서 "구름이 치는 전보 속에서는/깨알빛 새들이 시옷자 날개를 펴고/텅 빈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든지, "우체국을 품고 있는 산맥의 품에서/연필심이 수런수런 피어올랐다"는 표현은 눈으로 보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맛을 줍니다. 사진으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풍경의 이면이겠습니다.

시인의 눈이라는 앵글을 통해서 본 알프스 산맥은 "투명한 결정들이 지면을 이룬/거대한 엽서"와도 같은데요. "사람과 산양들이 서툰 글씨로/저마다의 사연을 기록해둔 곳"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잉크 자국조차 가물가물한 설원엔/펜혹을 닮은 바위들만 솟아 있었"구요.

그 우체국에서 엽서를 한 장 샀습니다. 당연히 알프스의 풍경 사진이 있는 엽서입니다. 그런데 "손바닥만 한 알프스를 사서는/그 뒷면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눈 삼키다 멈춰선 제설차의 기침을/옮겨 적"지도 못했습니다, "마을까지 퍼지지 못하고/바람에 증발되는 목동의 노래가/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엽서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엽서를 보내고 싶었던 대상의 형편 때문입니다. "해발 3,500미터의 쓸쓸한 우체국*에서/네가 있는 서울 반지하 주택까지의 거리가/크레바스보다 더 움푹 팬 흉터로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시가 보여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아픔이라고 하겠는데요. 알프스에 가서 그곳에 있는 우체국을 보면 누구든지 엽서 한 장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그래서 엽서를 보낼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구요.

   
▲ ⓒ부천타임즈

그런데 그 대상의 형편이 "서울 반지하 주택"입니다. 시인의 개인적 환경과 정서에서 나왔든, 아니면 시를 통해 촉발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장치에서 나왔든, "서울 반지하 주택"이 주는 울림과 상징성이 뚜렷하네요. "서울"의 현실과 대상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알프스에 와서 떠올리는 "반지하 주택"은 마음을 아프게까지 합니다. 주거 현실이 햇볕도 잘 들지 않으면서 냄새가 나기도 하는 "반지하"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까지의 거리가 "크레바스보다 더 움푹 팬 흉터로 아려왔다"는 자각 때문에 아픔이 극대화되면서 도저히 안부를 적을 수 없다는 사실에 동감하게 만듭니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엽서 위에/긴 문장을 적듯 천천히 우표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유리창에는 서리가 적어 놓은 주소가/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서울에 있는 수신 대상은 알프스에서 엽서를 보내려고 했던 발신자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

시의 제목을 "하늘 우체국"으로 했으니 엽서를 보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겠습니다. "하늘"이 그 마음을 알고 "하늘"이 그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적어 놓은 주소"를 "소리 없이 지워"버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 부천타임즈(http://www.bucheon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추천수 : 13
이 기사를 추천하시면 "오늘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부천시 대산동, 주민자치회 김영규 회
[인터뷰]신상현 심곡동 주민자치회장
부천시 10개동 주민자치회장 선출 완
[카메라고발]'코로나19' 감염 무방
[카메라고발] 흉물로 변한 소사 공구
[이종섶의 詩장바구니-69] '가을
행정안전부 선정 마을기업에 경기도 1
부천시가 지정한 코로나19 예방 '
경기도가 수원시에 특조금 120억
김명원 경기도의원, 건설교통위원장 내
부천시 원미구 부흥로 315번길 14 포비스타 1414호 | 대표전화 032-329-2114 | Fax 032-329-2115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경기아00018 | 등록일:2005년 11월2일 | 사업자등록번호 130-19-41871
종별 : 인터넷신문 | 발행인겸 편집인 : 양주승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양주승
Copyright 2003 부천타임즈.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bu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