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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64]이녁이라는 말
인생의 마지막 저녁에 더욱 환하게 켜질 등불을 위해서
2020년 06월 01일 (월) 13:02:39 이종섶 mybaha.naver.com
   
▲ ⓒ부천타임즈

이녁이라는 말
김효선


천천히 저물어가는 말
캄캄하다가도 가슴팍에 꽂히는,
찬 기운 올라오는 흙을 밟으며
노을이 오래 달인 가슴속으로
탈탈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부부가 나란히 돌아오는 저녁
'이녁 조롬에 감서.'*
이쪽의 무렵은 얼마나 저쪽으로 나앉아
신념이라는 쓸쓸한 등에 기대었을까
'이녁 이시난 살암주.'**
상처 난 곳도 새 살처럼 돋아 오는 말
무뎌진 말끝에 돋아난 잔풀을 뽑으며
'살당 보민 살아진다.'***
그늘도 서로의 종교로 남아
돌담에 오래 머물다 가는 말
'이녁 적시라.'****
당신이라는 말보다 더
당신 안에 머물고 싶은
이녁, 이녁이라는 환한 등


* 당신 뒤에 따라 간다.
** 당신이 있으니 살아간다.
*** 살아가다 보면 살아진다.
**** 당신 몫이라.

   
▲ ⓒ부천타임즈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면서 시를 쓰고 강의하는 김효선 시인이 제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시로 썼습니다. 「이녁이라는 말」인데요. 김효선 시인은 그 말을 "천천히 저물어가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녁"은 듣는 사람을 편하게 가리키는 말로 '당신'에 해당되는 2인칭 용어인데요. 아마도 "이녁"을 늘그막에 주로 사용하면서, 발음이나 느낌으로도 '서녘'과 비슷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녁을 "천천히 저물어가는 말"이라고 하면서 "캄캄하다가도 가슴팍에 꽂"힌다고 썼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이녁이라고 부르면서 살아가는 늙은 부부가 소박하지만 황홀하게 보여주는 풍경화 한 폭이 있습니다. "찬 기운 올라오는 흙을 밟으며/노을이 오래 달인 가슴속으로/탈탈거리는 경운기를 타고/부부가 나란히 돌아오는 저녁"입니다.

"찬 기운 올라오는 흙을 밟"는 것으로 보아 늦가을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요. 초봄의 농사는 바람은 쌀쌀해도 흙기운은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한 해가 끝나가는 계절인 늦가을에, 그리고 하루가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서 늙은 부부가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은 모든 것이 마무리요 마지막인 시점입니다.

그 마지막에 늙은 부부가 서로에게 말을 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녁 조롬에 감서"는 "당신 뒤에 따라 간다"는 말이구요. "이녁 이시난 살암주"는 "당신이 있으니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살당 보민 살아진다"는 "살아가다 보면 살아진다"는 말이구요. "이녁 적시라"는 "당신 몫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왔다고 해도 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망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무리의 내용 역시도 위와 같은 선하고 좋은 말이어야 합니다, 말은 마음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상처를 주는 말보다는 "상처 난 곳도 새 살처럼 돋아 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함께 오래 살다 보면 서로 무심해져 무뎌진 말을 무심코 할 수가 있는데요. 그때도 서로를 탓하기보다 그 "무뎌진 말끝에 돋아난 잔풀을 뽑으며" 잘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잔풀"을 보고서 그 풀이 왜 났냐고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저 말없이 뽑아주면 되는 것이니까요.

   
▲ 인생의 마지막 저녁에 더욱 환하게 켜질 등불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에는 햇빛만 들지 않는 법이어서 어떨 때는 의도치 않게 또는 습관적으로 자주 "그늘"이 찾아올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만 그 그늘조차도 믿고 신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늘보다 더 어두운 저녁이 찾아왔을 때 "당신이라는 말보다 더/당신 안에 머물고 싶은/이녁, 이녁이라는 환한 등"을 켜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저녁이 찾아왔을 때는 오직 등불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등불 하나 잘 준비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 등불의 심지가 마르지 않게, 촉촉한 말의 기름을 부어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비춰주면 됩니다.

등잔과 같은 내 가슴속에, 감사하게도 작고 여린 심지 하나가 보이네요. 오늘 밤, 따뜻한 말의 기름을 부어 등불을 켜봐야겠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저녁에 더욱 환하게 켜질 등불을 위해서는 오늘의 등불을 켜야 하니까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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