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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57] '숫돌'...잘록한 숫돌이 되어 올라가신 아버지
2020년 04월 13일 (월) 19:53:11 이종섶 mybaha.naver.com

숫돌
유은희
 

무딘 것들 아래 납작 엎드려
살아가는 날을 벼렸던 게 아니라
살점 베어내는 날을 견뎌냈을 것이다
저미고 스민 것들 뼛속까지 품어내다
잘록한 숫돌이 되어 올라가신 아버지,
벼리고 벼렸어도 여전히 나는
풀숲 한 길 헤쳐 가지 못하는
무딘 날인 것이다
 

 

   
 

지금이야 칼을 갈 때 숫돌을 쓰지 않고 칼을 가는 사람에게 맡기지만 예전에는 집마다 숫돌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껴 살던 시절이니 칼을 가는 일에 돈을 쓸 필요가 없었고 가정에서 남자가 칼을 가는 일이 흔했기 때문입니다.

 

칼 뿐만 아니라 가위도 갈고 낫까지 가는 집에서는 초벌로 가는 거친 숫돌과 마무리용의 부드러운 숫돌 두어 개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수돗가에 나란히 놓여 있는 숫돌에 먼지 같은 것들이 붙어 있지 않으면서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고 있으면 집안이 단정하면서 참 부지런하다는 느낌을 주고는 했습니다.

숫돌을 가장 많이 사용했던 사람은 아무래도 아버지였을 텐데요. 「숫돌」이라는 시는 칼을 가는 행위나 잘 벼려진 날을 주목하기보다 칼에 갈려지는 숫돌 자체를 주목해서 보여주고 있네요. 숫돌을 생각하면 정말 당연한 표현인데도 "무딘 것들 아래 납작 엎드려" 있다는 첫행의 울림이 제법 묵직합니다.

살아가면서 똑똑하고 잘나고 성품까지 좋은 것들만 어울리면 참 좋으련만, 그도 아니면 가끔이라도 힘든 마음을 풀어주는 것들과 관계할 수 있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어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련만, 만나는 것마다 "무딘 것들" 뿐이니 그 속이 얼마나 썩어들어가겠습니까.

자식들 모두가 반듯하게 자라지는 않아도 그 중에 두어 녀석, 아니 한두 녀석이라도 잘 자라주면 더없이 좋으련만 자식마다 하나같이 애비 애미 등골을 빼먹는 놈들 뿐이니 그 등짝이 얼마나 문드러지겠습니까.

그래서 숫돌은 "살아가는 날을 벼렸던 게 아니라/살점 베어내는 날을 견뎌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날"이 모두의 바람인지라 누군들 살기 위해 "날을" 벼리지 않겠습니까마는 여기 숫돌은 "살점"을 "베어내"면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살점 베어내는 날" 뿐이었습니다. 일평생의 수고가 단 한 번의 배부름이나 만족도 없이 모조리 견디는 일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숫돌을 보니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저미고 스민 것들 뼛속까지 품어내다/잘록한 숫돌이 되어 올라가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숫돌이 안 떠올랐는데 숫돌을 보니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너무나도 뚜렷하게 떠올라 뱃가죽이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요. 이 심정을 왜 이제사 느끼게 된 것일까요. "벼리고 벼렸어도 여전히 나는/풀숲 한 길 헤쳐 가지 못하는/무딘 날인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어서 숫돌 같은 아버지가 몹시 그립습니다. 당신의 몸으로 그렇게 나를 벼리려고 해고 그토록 벼려지지 않은 채로 결국 숫돌만 두 동강 냈던 나 자신이 훤하게 보여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슬픈 마음'을 가리키는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사무치네요. 아버지는 그런 삶을 사셨는데, 나는 그런 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부모가 될 자신조차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음에 벌초하려고 고향집에 가게 되면 제초기를 꺼낼 때 아버지가 쓰셨던 숫돌을 보게 될 터인데, 먼지도 거미줄도 다 털어내고 물로 잘 씻어서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자식을 위해 아버지가 구석에 남겨놓으신 육필 편지니까요.
 
 *단장(斷腸) :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편(黜免篇)에 나온다.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려고 배를 타고 출정했다. 양쯔강 삼협(三峽)에서 한 병사가 새끼원숭이를 잡아 왔다. 새끼를 잃은 어미는 슬피 울면서 백여 리를 따라오다 강이 좁은 협곡에서 배 위로 몸을 날렸으나 바로 죽고 말았다.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을 안고 온 힘을 다해 따라오다 창자가 끊어져버린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환온은 새끼원숭이를 풀어주고 그 원숭이를 잡아 온 병사를 매질하고 내쫓아버렸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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