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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56] "뽑아버리고 싶던 기억들"
2020년 04월 06일 (월) 11:48:01 이종섶 mybaha.naver.com
   
▲ ⓒ부천타임즈

치통
정원

좋아하던 술도 멈췄다
괜찮아지겠지 했던 방심들을 허물고
뿌리를 흔드는 통증
몇 알의 진통제도 녀석 앞에선 그저 속수무책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참기 힘든 아픔들을 생각해 본다
뽑아버리고 싶던 많은 기억들과 두고두고
묻어버리고 싶었던 많은 생각들

무너지면 다시는 일으켜 세울 수 없는
기둥처럼
더러, 흔들림은 있어도
마주쳐야 할 세상과도 같이
지탱할 뿌리는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남은 위로와 다시 세울 중심을
뿌리 속에 둔다

   
▲ ⓒ부천타임즈

우리 몸에 다가오는 통증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치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통증을 유발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치통이 시작될 즈음에  "좋아하던 술도 멈췄"습니다. 그러면 치통이 가라앉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요. "괜찮아지겠지"라고 짐짓 생각했던 "방심들을 허물"어버리면서 "뿌리를 흔드는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알의 진통제"를 먹어도 가라앉지를 않았습니다. 통증 "앞에선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찍 치과에 가지 않은 걸 후회하는 시간은 통증에 완전히 사로잡힌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치과에 도착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참기 힘든 아픔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뽑아버리고 싶던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두고두고/묻어버리고 싶었던 많은 생각들"도 떠올랐습니다.

"뽑아버리고 싶던 기억들"이 당시에 가져다준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치통이야 사람의 몸에서 머리 부분에 통증을 준다면 그 "기억들"의 고통은 온몸에 통증을 가져다주었으니까요. 그 기억의 실체를 잊어버리면서 통증을 덜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억의 통증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만 보였습니다.

어떤 "생각들"은 아예 뽑히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무통의 증세로 화인처럼 식어가는 아린 아픔 그 자체였는지, 뽑으려고 하다가는 더 큰 화를 부를 것만 같아 "두고두고/묻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천 삽 만 삽 삽질을 해도 도무지 묻어지지 않는 그 "생각들" 앞에서 서서히 부어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나 자신의 통증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기에 이를 뽑을지 그대로 두고 치료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하게 아는 사실은 이를 뽑으면 그 이를 다시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통 때문에 떠오른 삶의 고통이 인생을 좀 더 성숙시키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무너지면 다시는 일으켜 세울 수 없는/기둥처럼" 그렇게 되어버리면 안 되겠지요.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흔들림은 있어도"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기둥을 뽑아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마주쳐야 할 세상"에서 기둥을 "지탱할 뿌리는/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은 위로와 다시 세울 중심을" 꼭 기억하고 간직하면서 "뿌리 속에" 두기로 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다짐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합니다. 유혹이 있을지라도 이 결심에서 흔들리지 않기로 합니다. 이는 흔들려도 삶이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요.

   
▲ ⓒ부천타임즈

치통 때문에 치과 진료를 왔는데요. 진료를 기다리면서 인생 진료를 받았네요. 심한 통증을 겪으면서 이런 인생 진료를 받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귀한 진료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흐믓한 미소를 지어봅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통증을 잠시 잊고 있었네요. 아니, 통증은 지속되었는데 그 통증에 지배를 당하지 않고 내 생각이 그 통증을 다스리고 있었나 봅니다. 이것이 투약과 처치이자 처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뜻밖의 순간에 인생 진료를 받으며 확실한 처방전까지 받게 되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진료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 뒤로 눕는데 통증이 잘 느껴지지가 않네요. 그래도 이왕 치과에 왔으니 진료를 받고 가야겠죠? 의사 선생님이 물어보면 통증 때문에 왔다고 말해야겠죠? 말하는 순간 편안한 표정을 버리고 약간 찡그리면서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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