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0.6.4 목 08:23
,
   
+ 로그인 독자회원가입 전체기사 기사모아보기 보도자료
> 뉴스 > 문화/예술
       
[이종섶의 詩장바구니-55]오랜만의 밀회는 뜨거웠다
2020년 03월 30일 (월) 11:13:43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나쁜 남자
이영혜

수상한 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어왔다
은밀한 체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오랜만의 밀회는 뜨거웠다
이성과 윤리를 금서처럼 불태우고
너는 신경에 근육에 맹독으로 스며들었다
캄캄한 의식의 동굴 속에서
여섯 날과 마지막 또 하루를 우리는 뒹굴었다
입술과 잇몸과 혓바닥까지 너는
화인 같은 키스마크를 새겨 놓았다
내 안의 진액이 혼처럼 빠져나가고
세포들은 정사(情死)하여 끝없이 실려 나갔지만
역시 끝은 담배 연기만큼 고요했다
나를 범한 너는 머리카락 한 움큼 움켜쥐고
참혹하게 떠나갔다
내성도 면역도 허락지 않는 너라는 바이러스
무덤까지 따라와 내 품에 순장될 것이다
네 흔적을 뱉어 내려는 바튼 기침에
봄꽃, 각혈하듯 팡팡 터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뜬소문이 먼지처럼 밀려오더니 마침내 "수상한 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은밀한 체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구요. 무방비 상태로 혼절하듯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랜만의 밀회는 뜨"겁게 불타오르면서 모든 지각과 판단력을 송두리째 지워버렸습니다. 그동안 신념처럼 가지고 있던 "이성과 윤리를 금서처럼 불태우"면서 그는 "신경에 근육에 맹독으로 스며들"어 버렸습니다.

나쁜 연애에 빠져 "캄캄한 의식의 동굴 속에서" 칩거하는 동안 "여섯 날과 마지막 또 하루를 우리는 뒹굴"며 보냈습니다. "입술과 잇몸과 혓바닥까지" 온통 그 나쁜 남자는 "화인 같은 키스마크를 새겨 놓았"구요.

온몸에 전율이 일어 속수무책으로 "내 안의 진액이 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세포들은 정사(情死)하여 끝없이 실려 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흔한 통속 연애소설처럼 역시나 "끝은 담배 연기만큼 고요했"습니다.
춥고 외롭고 쓸쓸했던 겨울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을까요. 그런 나의 상태와 감정을 와락 낚아채기라도 하듯 "나를 범한" 그는 결국 "머리카락 한 움큼 움켜쥐고"서는 "참혹하게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가 아직까지 내 옆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은 뭘까요.

그래서 "내성도 면역도 허락지 않는" 그와의 만남에 치를 떨면서도, '그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무덤까지 따라와 내 품에 순장될 것"이라고’ 애증이 공존하는 감정에 함몰된 저주와 사랑의 말을 화인처럼 독하게 내뱉습니다.

   
▲ ⓒ부천타임즈

그 남자의 "흔적을 뱉어 내려는 바튼 기침"이 그치지 않는 시기입니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꽁꽁 싸매고 있는데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아니 그 속에 섞여 있는 찬바람이 얼굴에 스치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아픔과 상처가 곧 지워질 거라고 쉽게 말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날이 과연 올까요? "봄꽃"이 천지에 “각혈하듯 팡팡 터지고 있”는데요. 아니, 사실은 "각혈하듯" 그렇게 "봄꽃"을 "뱉어 내"고 있는 것인데요.

사람들이 봄꽃을 보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연애질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진 나머지, 그러면서도 각혈에 오염이라도 될까 두려웠는지 조심조심 소매로 입을 가리거나 마스크를 쓰고서 힐끗힐끗 쳐다보네요. 심지어는 하얗게 각혈한 그 앞에서 체증하듯 사진을 찍어대기도 하구요.

이 처연한 봄날이 어서 갔으면 좋겠습니다. "북서쪽에서 불어"온 "바이러스"가 얼른 "무덤"에 내려가 버렸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꽃의 위치가, 꽃과 사람의 교감이 다시 예전처럼 애틋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봄이니까요. 빼앗긴 들에 다시 봄이 찾아오는 것이니까요.*

*이상화(李相和)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이 빚어낸 시로,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불린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 부천타임즈(http://www.bucheon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추천수 : 15
이 기사를 추천하시면 "오늘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부천시의원, 급여 압류에 이어 사기
'알선뇌물약속' 혐의 이동현 부천시의
부천시의회 의장 선출 두고 민주당 내
한국애니메이션학회,만화영상진흥원 부장
부천시의회 '후반기 의장선거' 힘겨루
장덕천 부천시장의 '코로나19' 페이
이동현 의원 "비판 많이 하는 언론에
'부천시민 의정감시단',행정사무감사
[김종옥 작가의 포토엣세이] 떠나버린
최윤희 초대 부천시박물관장 임명
부천시 원미구 부흥로 315번길 14 포비스타 1414호 | 대표전화 032-329-2114 | Fax 032-329-2115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경기아00018 | 등록일:2005년 11월2일 | 사업자등록번호 130-19-41871
종별 : 인터넷신문 | 발행인겸 편집인 : 양주승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양주승
Copyright 2003 부천타임즈.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bu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