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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52]신수옥의 '전세금'
2020년 03월 09일 (월) 13:05:54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전세금
신수옥


올해도 세를 올려달라고 산이 통보했다
가난한 나무들 서둘러 비상금을 털어본다
지갑 속에 꼬깃꼬깃 접어 둔 파란 지폐들을 꺼내놓는다
가지마다 지폐들을 촘촘히 내밀자 비로소
산이 푸르게 웃는다

아카시아, 소나무는 넓은 평수 자랑하며 우쭐대는데
산비탈 연립주택 진달래, 찔레가
기죽지 않으려 서둘러 꽃을 피운다

갈참나무 우듬지 옥탑방에
한 철 세든 산새들
벌레잡이, 산 청소로 둥지세를 탕감 받는다

살림꾼 다람쥐는
세입자들 셋돈 챙겨
산의 주머니 여기저기 채워준다

음지에 사는 나무들
햇살을 대출 받으려 길게 목을 빼고 있다
산의 비위 건드리면 행여나 방 빼라 할까봐
살랑살랑 잎사귀 흔들며
아래로 깊이 뿌리 뻗어
큰 바위 하나
힘껏 붙잡는다

   
▲ ⓒ부천타임즈

봄부터 시작되는 산의 풍경과 이야기를 그린 시인데요. 산뜻하면서도 동화 같은 느낌까지 있어서, 이 시를 여러 번 소리 내서 읽어보면 연두 내음 가득한 봄바람이 가슴속에 가득 불어올지도 몰라요. 아이들에게도 낭송해주면 그야말로 안성맞춤, 아이들 눈동자에 연둣빛 고운 새싹이 보일 거예요.

주인인 산이 나무들에게 세를 올려달라고 하지만 사람같이 욕심쟁이이거나 야박하게 느껴지지가 않네요. 그건 아마도 나무들이 세를 지불할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일 거예요. 산도 나무들을 위해 가을부터 거름을 쌓아 겨울에 잘 묵혀두면서 발효까지 시켜두었기 때문이구요. 그뿐만 아니죠. 차가운 함박눈을 오래도록 안고 있으면서, 나무들이 봄이 되면 새싹과 꽃잎을 잘 틔울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수분을 공급해주었기 때문이에요.

나무들도 산의 말에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아요. 세를 올려달라는 산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아요. 비상금과 지갑 속에 있는 것까지 다 꺼내면 일 년을 살면서 열매도 맺고 꽃도 피우기에 충분해서, 큰 나무는 물론 작은 나무들까지 환경과 형편에 맞는 전세금을 다 준비해서 꺼내놓을 수 있으니까요.

연둣빛 지폐를 마련하지 못하는 산새는 벌레를 잡고 산을 청소하면서 둥지세를 탕감받으니 참 훈훈하죠? 다람쥐는 세입자들의 셋돈을 챙겨서 산의 주머니에 넣어주니 정말 기특하구요. 음지에 사는 나무들은 햇살을 대출 받으려고 길게 목을 빼고 있는데요. 혹시라도 햇살의 비위를 건드리면 방을 빼라고 할까봐, 아래로 깊이 뿌리를 뻗어 큰 바위 하나 힘껏 붙잡고 든든하게 살아가요.

신수옥 시인의 시 「전세금」을 읽고서, 햇살 따사로운 들길도 걷고 산길도 걸어가요. 어떤 나무는 연둣빛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어떤 나무는 빨갛고 노란 꽃망울을 피울 준비를 해요. 산과 나무들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봐요. 주인과 세입자 사이지만 조화롭고 평화롭게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숨결이 느껴져요.

물론 주인은 주인인지라, 주인이라는 특성이 나타나구요. 세입자 역시 세입자인지라, 세입자만의 특성이 나타나네요. 그러나 특별히 문제 되지 않아요. 나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친한 사이에 주고받는 애교니까요.

전세금이 해마다 치솟는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나요? 전셋집도 구하기 어려워서 이사할 때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하소연도 많지요? 그럴 때마다 주인과 세입자 사이에 동화처럼 벌어지는 이 시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산은 산의 적정으로 나무는 나무의 생명력으로 그렇게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산과 나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그렇게 하기로 봄의 가지 같은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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