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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50] '움트는 집'
2020년 02월 24일 (월) 12:54:38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움트는 집
이주송

베란다 대청소를 하다가 눈에 띈
작은 종이박스 하나
골라 먹고 남은 호박고구마 대여섯 개
주먹만 한 것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속은 텅 비고
쭈글쭈글 껍질만 남은 미라
탱탱하고 단물 많던
제 몸의 피와 살을 내어주고
쪼그라진 숨구멍마다
새순을 한 뼘이나 밀어 올리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허리춤에
복대를 둘둘 감은 할머니
창도 없는 뒷방에 물러앉아
색 바랜 스웨터를 풀어
볼록한 돋보기 너머
손주 목도리를 비뚤비뚤 짜고 있다
한 코 한 코 세울 때마다
시나브로 늘어나는 여린 잎들
반 접혀 주렁주렁 구부러져 달려 있다
조심스레 펴 보려 이리저리 달래봐도
옹알이도 못하고 눈도 맞추지 못한다
울퉁불퉁 구를 뿐
어둠 속에서 물 한 모금 없이 견뎌온 날들
은밀한 숨결이
연보랏빛 싹을 틔우고 있다

   
▲ ⓒ부천타임즈

매년 이때쯤이면 들판에는 농사 준비가 시작됩니다. 소소한 즐거움을 위한 텃밭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우내 남아 있던 검불과 작물 찌끄러기를 모아서 태웁니다. 그대로 뒀거나 미처 거둬내지 못한 비닐을 깨끗하게 치웁니다. 한 해 농사의 시작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과 주말농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겨울이 지나가는 2월 말의 길목에서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새봄이 다가오고 있는 기운이 느껴지기에 3월이 오기 전 잔뜩 움츠리고 살았던 마음의 그늘을 벗겨내고 싶어 합니다.

그때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베란다 대청소"입니다. 겨울의 베란다는 꾸밈이나 전망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이것저것 갖다 놓는 공간에 불과하니까요. 특히 거실에서 바로 보이는 베란다보다는 보이지 않는 좌우 구석이 더욱 그렇습니다. 거기에 "종이박스" 한두 개쯤 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 박스 안에서 "호박고구마 대여섯 개"가, 그 "주먹만 한 것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속은 텅 비고/쭈글쭈글 껍질만 남은 미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들이 "탱탱하고 단물 많던/제 몸의 피와 살을 내어주고/쪼그라진 숨구멍마다/새순을 한 뼘이나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소외되고 잊혀진 고구마가 제 몸을 버려가며 생명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껍데기만 남은 허리춤에/복대를 둘둘 감은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창도 없는 뒷방에 물러앉아/색 바랜 스웨터를 풀"고서는 "볼록한 돋보기 너머/손주 목도리를 비뚤비뚤 짜고 있"던 정 많은 할머니 말입니다.

"베란다"가 "뒷방"이었고 "뒷방"이 "베란다"였습니다. "고구마"가 "할머니"였고 "할머니"가 "고구마"였습니다. 그렇게 그런 곳에서 고구마할머니가 "한 코 한 코 세울 때마다/시나브로 늘어나는 여린 잎들"이 "반 접혀 주렁주렁 구부러져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레 펴 보려 이리저리 달래봐도/옹알이도 못하고 눈도 맞추지 못"합니다. "울퉁불퉁 구를 뿐/어둠 속에서 물 한 모금 없이 견뎌온 날들"이 새싹을 띄우면 얼마나 틔울까요. 설령 새싹을 틔우고 키웠을지라도 그 작은 줄기와 잎사귀들이 땅에 심겨 뿌리를 뻗어 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형편이니까요.

그래서 "은밀한 숨결이" 틔운 "연보랏빛 싹"이 순간 예쁘게 보이나 이내 애틋한 마음을 품게 합니다. 겨우내 베란다에서 있었던 쭈글쭈글한 고구마가 틔워낸 싹은 대부분 버려지게 되니까요. 이쯤 되면 할머니가 낡은 털실로 짠 "손주 목도리"가 오버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받는 순간은 '예쁘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진심으로 나왔겠지만, 오래가지 않아 그 목도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니까요.

햇볕 따사로운 2월 마지막 주간의 어느 날, 마음먹고 베란다를 청소하는데 문득 ‘내가 갖다 놓고서는 잊어버렸던 고구마 박스’가 보이네요. 그러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보이구요. 베란다를 정리만 하지 않고 물청소까지 하기를 잘했다 싶습니다. 안 그러면 눈물을 훔치다 젖은 옷소매를 가족에게 들켜 민망할지도 몰라서요. 눈시울 벌거질 때는 아예 얼굴을 씻으며 청소를 하면 되니까요.

베란다 청소하다 얼굴을 씻는데 마음까지 씻어집니다. 베란다 밖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구름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어머니, 거기는 뒷방이 아니지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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