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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48] '거목 앞에서'
거목의 배웅을 받으면서 떠나온 고향입니다
2020년 02월 10일 (월) 08:36:42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거목 앞에서
유나영

전설이 묻혔으리라 묻는 자리에서
한 그루 거목을 본다
거목은 나이테마저 지워놓고
속까지 비워놓고
몸통 후미진 곳에 가지 뻗으면서
모든 것을 덜어낸다

원목은 메말라 고목 진가지에서
숨을 쉬면서
행인을 붙잡고 벌거벗은 알몸 보이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 한다
수많은 세월을 가꾸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깨달음에 이르는
저 한 그루의 거목을 본다

첩첩 산자락 잡고
개울물 흐르는 쪽에 고개를 둔
거목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무심으로
물처럼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가라 한다

   
▲ ⓒ부천타임즈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든 살면서 자리 잡은 터전이든 그곳에서 "한 그루 거목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곳을 떠나왔어도 "나이테마저 지워놓고/속까지 비워놓고/몸통 후미진 곳에 가지 뻗으면서/모든 것을 덜어"내는 거목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목은 고향 마을과 살아온 마을의 상징이자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 거목이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으라"구요. 거목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은 채/깨달음에 이르는"지라, 말과 행실을 함께 겸비한 "저 한 그루의 거목을" 볼 때마다 숙연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이틀 또는 며칠을 고향의 품에 안겼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거목은" 다시 말합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무심으로/물처럼/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가라"고 말합니다.

거목의 배웅을 받으면서 떠나온 고향입니다. 거목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살아가는 타향입니다. 그런데 거목의 말씀이 희미해져갑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삶이 고달파지고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내려놓기는커녕 갈수록 움켜쥐기만 하는 자신이 밉기만 합니다.

   
▲ ⓒ부천타임즈

유나영 시인이 거목을 소재로 쓴 다른 시를 보면 "거목 하나가 부유한 몸짓으로/산길을 키우고 있다"(「거목 하나가」)고 나오는데요. 내려놓으면서 산다고 해서 가난하기만 하거나 부유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목은 내려놓으면서 "부유한 몸짓"을 지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산길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내려놓으면서 진정한 부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려놓으면서 발견하고, 만들어가고, 키워가는 참된 "길"을 걸어가며 자유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부천타임즈

그런데도 내 눈은 왜 이렇게 어둡기만 한 걸까요? "메말라 고목 진가지에서/숨을 쉬면서"도 "행인을 붙잡고 벌거벗은 알몸"을 보여주면서 "모든 걸 내려놓으라"고 거듭 당부하는 거목을 왜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요? 내 귀는 왜 이렇게 어둡기만 한 걸까요? "첩첩 산자락 잡고/개울물 흐르는 쪽에 고개를 둔/거목"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 왜 엉뚱한 말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걸까요?

철부지같이 미욱하기만 한 나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다음에 고향에 갈 때에는 눈과 귀를 깨끗이 씻고 가야겠습니다. 아니, 고향의 거목 앞에 선 바로 그 자리에서 눈과 귀를 깨끗하게 씻어야겠습니다. 그래야 거목을 제대로 보고 거목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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