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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47]호두나무 실버보험
2020년 02월 03일 (월) 11:57:29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호두나무 실버보험
이정희

노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불확실한 날들을 위해
호두나무는 실버보험을 청약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박아 물을 벌고
햇볕 주사를 맞아가며 영양분을 납부했다
높게 뻗은 가지 풍성한 잎들은
든든한 특약 열매를 매달았다

연두로 둘러싼 딱딱한 속껍질 약관
벌레도 단단한 방어막을 뚫지 못해
속이 빈 경우는 한 번도 없다
해마다 풍성한 보장을 약속하며
초록 호두 보험료를 적립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보장의 범위는 커지고
배당금은 단단하게 쌓여갔다

태풍에 왼쪽 어깨가 부러져
장기 입원치료를 했을 때
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깊은 그늘을 끌고 저녁이 왔다
늘어나는 노후자금
자식들은 서먹하게 눈치 보며
가쁜 숨결 붉은 기운으로 뛰어다닐 때
종신연금 실버보험은 걱정을 걷어주었다
 
햇살 환하게 비추는 가을
주렁주렁 매달린 호두알 보장
필요할 때마다 한 바구니씩 딴다

   
▲ ⓒ부천타임즈

지난 명절 연휴에 뵈었던 부모님이 눈에 남아 어른거립니다. 이러저러한 잔병치레로 고생하는 모습과 해가 다르게 늙어가는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변변한 보험 하나 제대로 들어놓지 못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참고 지나가는 부모님이 안쓰러워, 올해도 더욱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부모님을 뵈었던 명절에 나이 든 형제들도 만났습니다. 어릴 적 함께 지낼 때의 모습은 다 사라져버리고 흰머리와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만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지병을 달고 사는 형제도 있고, 안 해도 될 고생을 많이 한 형제도 있습니다. 자식들 혼사에 들어갈 비용 때문에 걱정을 한 아름 품고 있는 형제도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형제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거꾸로 자기 평판에 관한 일상적인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도 나이를 많이 먹었거나 늙기도 했으며, 자신 역시 노후와 관련해서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심적 부담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 명절 이후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오면, 추석 명절에 다 같이 한자리에 다시 모일 가족들이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노후를 생각하든 나 자신의 노후를 생각하든, "노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날들"때문에 발생하는 걱정이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 ⓒ부천타임즈

"땅속 깊이 뿌리를 박아 물을 벌고/햇볕 주사를 맞아가며 영양분을 납부"하는 호두나무처럼 모두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높게 뻗은 가지 풍성한 잎들"이 "든든한 특약 열매를 매달"고, "연두로 둘러싼 딱딱한 속껍질 약관"은 "벌레도 단단한 방어막을 뚫지 못"하게 만들어,"“속이 빈 경우는 한 번도 없"는 한 해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햇살 환하게 비추는 가을"에 "주렁주렁 매달린 호두알 보장"을 "필요할 때마다 한 바구니씩" 따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야 "해마다 풍성한 보장을 약속하며/초록 호두 보험료를 적립"한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니까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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