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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2004년 10월 09일 (토) 00:00:00 부천타임즈 webmaster@bucheontimes.com

   
▲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차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역사학자와 함께 하는 차문화기행

▒ 일 시:  10월 29(금)  오전 8시 30분  ~  30일(토) 오후 9시
▒ 코 스: 강진 다산초당→백련사 →무위사 극락보전→해남 윤선도 생가→
          대흥사 일지암→구례 화엄사→구례 장죽전
▒ 주 관: 한국차문화협회 부천지회, 사단법인 부천역사문화재단
▒ 강 사: 최현수(부천역사문화재단 소장, 국편 사료조사위원, 부천타임즈 역사문화 전문기자)
▒ 회 비: 80,000원(계좌번호:기업은행 334-001835-04-014 (사)부천역사문화재단)
▒ 예약및 문의 전화:032-657-6409

   
▲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 강진의 연혁 및 인물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강진은 북으로 월출산 천황봉을 분기점으로 영암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 장흥군과의 경계에 수인산·부용산·천태산, 서쪽 해남군과의 경계에 서기산·석문산·만덕산·주작산이 있으며 강진읍을 감싸 안은 북쪽에는 소머리 형국의 우두봉(牛頭峯)이 자리잡고 있다.

쪽빛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하고 있고, 탐진강을 중심으로 질펀한 들판이 펼쳐져 있어 특히 쌀은 그 질이 좋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리생산과 맥우(麥雨 : 고급 한우고기)를 대표적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지금은 ‘청자’로 유명하다.

강진군은 태종 17년(1417)에 도강과 탐진의 두 현을 합쳐 강진현으로 된 후 1914년 현재와 같은 강진의 윤곽이 이루어졌다. 해양성 기후와 함께 기름진 땅의 고장 강진은 국가지정 10대 축제 중 하나인 청자문화제가 매년 열리면서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다산초당

 1. 다산초당
전남 강진은 조선 실학사상의 대가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박해 때 사학과 관련 되었다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되어 처음 8년간은 강진읍 동문 밖에 머물다가 1808년부터 귀양이 끝나는 1818년까지 약 10년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지냈다.

만덕리 귤동 만덕산 중턱에 위치한 다산초당은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본래 다산초당은 이름 그대로 초가 건물이었으나 1936년에 허물어져 현재의 건물은 1957년 기와를 이어 복원한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기도 하는 등 명실 공히 조선 실학사상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다산초당을 비롯해 다산이 거처하던 동암과 제자들이 유숙처였던 서암이 있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이라는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 중 초당의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인데 반해 보정산방이라는 현판은 김정희가 평소 존경하던 다산을 위해 일부러 쓴 것으로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가 돋보인다. 동암에 걸려진 '다산동암'이라는 또 하나의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초당 주변에서는 일명 다산4경이라 불리는 정약용 선생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산이 '丁石' 이라는 글자를 직접 쓰고 새긴 정석바위,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약수가 솟아나는 약천, 다산이 솔방울을 지펴서 차를 끓였다고 하는 넓은 반석 다조, 연못 가운데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 직접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이 그것이다.

동암 바로 옆으로는 천일각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자리합니다. 멀리 구강포의 시원한 자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과 가족들을 그리며 시름을 달래던 장소라 합니다. 원래부터 이곳에 누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산의 뜻을 기려 1970년대에 세워진 것이다.

최근 다산초당 아래 또 하나의 볼거리가 들어섰으니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진 다산유물전시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는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7분짜리 영상물이 수시로 상영되고 있다.  위치 : 도암면 만덕리 귤동 [문의 전화 : 정다산 유적관리사무소 061-432-5460] 

■ 해남의 연혁 및 인물
해남군은 한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전남 최대의 군역으로 동쪽과 동북쪽만 강진·영암과 연결된 육지이고 3면이 모두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로 되어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영산강 유역의 문화요소들이 파급되거나 형성되는, 혹은 반도의 중심세력이 전파되는 막다른 골목으로서, 더욱 크게는 이곳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문화 이동로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으로 주목되는 고장이다.

해남은 해남반도와 화원반도, 그리고 산이반도 등 3개의 반도를 군역으로 하고 있는 관계로 많은 유·무인도에 긴 리아스식 해안선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 해안선의 굴곡마다에 간척지와 염전, 김 양식장 등이 발달하고 화원반도와 영암군을 연결하는 영산강종합개발계획에서 보듯이 아직도 농경지를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지역발전 면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 국가경제 및 지역경제의 중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불이익이 있고, 군역이 분지형반도(分枝形半島)로 되어 있어서 생활권 형성과 사회통합 기능면에서 어려움 있다.

또 지역의 면적이 너무 크기 때문에 행정 서비스 면에서 소외된 지역이 있고, 지역 특성상 농업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아주 낮아서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지역발전계획의 자주성 확보에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 ⓒ전북 무안군 초의선사 동상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초의선사 유적지
초의가 40여년을 차와 함게 살아온 일지암을 오르는 길은 차 한 잔의 의미만큼 음미해 볼만한 정도다. 서산대사가 삼재(물난리, 불난리, 전쟁)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발을 남겼던 대둔사(대흥사)를 지나 동백, 후박, 붉가시나무, 황칠나무가 둘러진 두륜산 난대 숲길을 따라 30분 정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일지암은 대둔사의 13대종사인 초의(草衣)선사(1786-1866)가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불리우는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하면서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사상을 확립, 조선후기 쇠퇴해 가던 차문화를 중흥시킨 차의 성지이다.

초의가 달 밤에 혼자서 혹은 그를 찾아온 벗들과 함께 담소하며 차를 마셨을 다정(茶亭),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을 타고 돌물확에 넘쳐흐르는 다천(茶泉), 차를 끓이던 다조(茶부엌조가 없음), 일지암에는 초의의 다선일여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보존되거나 복원되어 차를 사랑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초의선사와 그 벗들초의선사의 속세 이름은 장의순이며 15세에 출가하여 19세 때 대둔사의 완호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라는 법호를 받았다.

22세부터는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탐방하고 점차 선(禪)은 물론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에도 능통하였다.

초의는 당시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과도 유 · 불 사상을 넘나드는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초의와 나이가 같은 추사 김정희와는 차를 통해 어린아이들 같은 깨끗하고 순박한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는 매년 햇차를 만들면 서울에 있는 추사에게 보냈으며 추사는 언제나 초의가 만든 차를 기다리며 차의 답례로 그의 글을 보내주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가 38회, 시가 6수나 된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을 감안한다면 서로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초의는 추사가 말년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있을 때에는 그를 위해 그의 제자들과 대둔사에 대광명전을 건립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남인화의 대가로 칭송받는 소치 허유 또한 초의를 통해 추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초의는 추사뿐만아니라 당시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도 활발한 접촉을 하였다. 초의보다 24세나 위인 다산은 초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초의의 성숙된 삶을 시를 통해 읊기도 했다.

이밖에도 당시의 대학자들과도 막힘 없는 교류를 가졌으며 이를 통해 초의는 시문(時文)과 서화(書畵)에도 능통할 수 있었으며 종래의 고루한 선관(禪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통합적인 성격의 선사상(禪思想)을 형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해남의 다인(茶人)들
초의선사를 통해 다시 일어선 차문화는 일제식민지 시대와 미군정, 6.25를 통한 민족의 험난한 시련을 겪는다. 우리의 전통문화들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뽑히듯 차문화 또한 그 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6.25 이후 경제 논리가 지배하면서부터는 바쁜 생활속에서의 차는 한낱 사치스런 생활로 치부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세계는 우리의 조상들이 물질의 빈곤 속에서도 여유있고 멋을 가질 수 있었던 문화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으며 그 답의 하나로 일상적인 차생활을 꼽을 수 있게 된다.

초의가 머문 일지암에서 차에 대한 연구와 그것을 널리 대중적으로 보급시키고자 노력하고 계신 여연스님, 그리고 일상에서 차를 생활하고자 모인 여러 개의 차 모임등은 초의의 뜻을 이어 생활 속에 녹이고자 하는 이들이다.

일지암을 뒤로하고 대둔사 동다실에 들러 "차나 한 잔 들고 가게"

■ 구례의 연혁 및 역사적 인물
전라남도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례는 소백산맥 남단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전라북도 남원시, 경상남도 하동군, 전라남도 순천시·광양시와 인접하고 있으며 총면적 443.01㎢ 중 산지가 78.3%를 차지하며 경지는 15.7%에 달하여 산간지역의 성격을 띠고 있는 편이다.

구례군의 면적은 전남지역 중 협소한 편이지만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할 뿐만 아니라 수리시설이 완비되어 농업이 발달했으며 섬진강변의 두터운 사질층에서는 양질의 배추, 무, 당근, 파 등이 생산된다. 또 맛이 일품인 신선한 구례오이는 전국 각지와 일본까지 수출되고 있으며 우리밀 가공제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

구례는 예로부터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했다. 지리산, 섬진강, 들판이 크고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이 아름답다고들 한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태고의 신비와 오랜 조상의 얼, 찬란한 민족 문화의 향기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구례군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지리산의 자연 자원과 그 자락에 안겨 있는 불교문화의 성지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의 역사문화자원, 그리고 최근에 개발된 지리산 온천으로 인해 연중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관광과 휴양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 구례 화엄사

1. 화엄사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 후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 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이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이 보제루는 다른 절에서는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달리 루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절내에는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 보다 한단 높은 더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1) 각황전
조선시대에는 선종 대본산 큰 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2)각황전 앞 석등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3)화엄사사사자 삼층석탑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어머니와 관련되는 전설을 지닌 석탑으로 근본 조형은 이중기단의 3층석탑인 기본형을 취하고 있으나 상층 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여 준다.

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고대 양식에 속하는 3구식(三軀式)의 안상을 조각하여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양각하였다. 천인상의 자세는 악기를 연주하는 상, 춤을 추고 꽃을 바쳐 공양하며 불천(佛天)을 찬미하고 있는 상 등 다양하다. 상층 기단에는 귀기둥(우주)을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꿇어앉은 암수 2마리씩의 사자를 배치하고 머리 위에는 연화대를 얹어 甲石을 받치게 하였다. 또 중앙에는 찰주 대신 합장한 대덕의 입상을 세웠고, 갑석 裏面 중앙에는 연화를 조각하여 天蓋를 삼는 등 다양한 특징을 갖추게 하였다. 귀기둥을 사자로 대치한 양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자 배치 양식과 관련된다.

탑 조성에 있어 착상이 기발하고 조각이 우수한 점 등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사자탑 가운데 이를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게 한다.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한국 석탑형식 분류에서 異形石塔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석탑이다. 조성 년대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으로 보인다.

2. 장죽전 - 신라차 시배지 지리산, 화엄사의 장죽전(長竹田)을 중심으로
사광암(沙光岩) 차문화연구가

♤중구난방의 차의 시배지 기록들
한국 8경(八景)의 하나이며 1968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전남 구례군을 비롯, 전북 남원군,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3도, 5개 군에 걸쳐 있으며 구례지역에는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하동지역에는 칠불암, 쌍계사, 산청지역에는 법계사, 대원사, 함양지역에는 벽송사, 영원사, 남원지역에는 실상사 등의 이름난 사찰이 산재해 있다.

<동국여지승람>진주목(晉州牧)조에 지리산(1,915m)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지리산(智異山)은 산세가 높고 웅거하여 수백 리에 웅거(雄據)하였으니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자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 산을 남악(南岳)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요. 서쪽은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태을(太乙: 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이 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였다.

또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 '중국 전설에 동쪽 바다 복판에 있어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3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일컫는데 지리산은 그 중의 방장산이다. 이 산자락에는 화엄사, 쌍계사, 칠불암, 연곡사, 천은사 등 큰절이 산재해 있다.'고 기록되었다.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심은 장소는 어느 지역인지 분명히 판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에이리는 <조선의 차와 선>에서 '정다산(정약용)은 이를 지리산 쌍계사 부근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즉 김명배는 '정약용이 지은 <여유당전서>나 <보유편>(補遺編)이도 그러한 기록은 없으며 고증이 안 된다'고 <한국차학회지>(1998-2)와 그가 지은 <다도학>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증이 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쌍계사 입구에는 '견당사 김대렴 차시배추원비' 또는 '차시배지' 표지석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 건립되어 있어 차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는 '김대렴'이란 기록이 없으며 이 지역이 '신라차 시배지'라는 사실이 고증되지 않았다.

우선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장죽전(長竹田)에 심었다'는 문헌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차(茶)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0. 동12월 조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케 했다. 당의 문종(文宗)은 (사신을) 인덕전으로 불러서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했다.'는 내용이 최초이다.

만우(蔓宇) 정병헌(鄭秉憲; 1891-1969 화엄사 주지역임)이 쓴 <해동호남도지리산 대화엄사사적>(海東湖南地異山 大華嚴寺事蹟)에 '한국의 차는 진흥왕 5년(서기 544년), 인도의 연기(緣起)스님이 지리산에 들어와 화엄사를 창건할 때 차씨도 같이 심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그 터 자리가 화엄사 아래 산기슭 장죽전(長竹田)이고 신라 흥덕왕이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지고 온 대렴에게 그 씨앗을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령한 것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종합하여 볼 때 녹차의 '시배지'는 현 주민들이 '진대밭'이라 부르는 화엄사 밑 장죽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풍수사(風水師)들은 지리산의 주봉을 천왕봉이 아닌 문수봉(文殊峰)으로 보아 지리산은 전라도 산이라 한다. 지리산 산신제를 노고단이나 문수봉 아래에서 지낸 것도 이 때문이다.

지리산 장죽전은 황전리 화엄사 밑 산기슭에 위치한다. 관광시설단지를 지나 매표소로부터 약 80m지점에 인조목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맞은 편 계곡을 건너면 양지바른 산기슭 솔숲속에 주민들이 예부터 '진대밭'이라 부르는 대밭이 있다. 현재 마산면 단위조합에서는 황전리 부근에서 생산되는 차와 상사부락 일부에 조성되어 있는 차단지에서 연간 200㎏정도를 수매하여 시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 등 사찰에서 지리산록 구례관내 30정보(町步)에서 나는 자연생 차잎을 따서 자가소비용을 생산하고 있다.

   
▲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 우리나라 차의 전래와 전파 고찰
◆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김해 백월산에 심었다'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의 기록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 제2대 거등왕이 즉위년(199)에 제정한 세시에 술을 빚고 차(茶), 떡, 밥,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이 오기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 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 호암 문일평은 백제의 차 전래는 거의 분명하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 듯 하다. 백제와 중국과의 통로인 금강하구의 익산 웅포의 봉화산 차나무, 동진강하구에 위치한 부안군 개암사 뒷산에도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또한 비록 기록에는 없으나 고구려 차의 가능성도 벽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황해남도 안악 3호분과 중국 집안의 무용총, 씨름무덤에서 다기와 차생활 모습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남아 있다.

◆ 828년 대렴이 차종자를 당나라에서 가져온 것 보다 약 100년 전에 '연기조사가 인도 차종자를 화엄사 장죽전에 심었다'는 기록과 '신라 차나무를 중국으로 가져가 구화산에 심었다'는 중국측 기록을 우리나라 차의 전래와 전파에 상호 연관지어 보다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차의 전래를 '대렴이 828년 당나라로부터 가져 왔다'는 <삼국사기>기록만 강조하기보다는 그 이전의 우리나라 차나무와 차문화에 대해 보다 다양하게 연구, 조사하고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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