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9.11.14 목 11:20
,
   
+ 로그인 독자회원가입 전체기사 기사모아보기 보도자료
> 뉴스 > 문화/예술
       
[이종섶의 詩장바구니-31] 은행나무를 일으켜 세우다
2019년 10월 14일 (월) 10:56:33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은행나무를 일으켜 세우다
최분임

음식물쓰레기를 쏟으려고 뚜껑을 열자
은행 알들 소복하다

허공을 향해 와르르 쏟아내는
저 말간 말들
生인지 주검인지 알아듣지 못하는데

나무 한 그루를 잉태한 몸
허드레 악취 벗어던지고 나면
수백 년 가부좌로 속세를 굽어볼 수 있을까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 늡늡할 수 있을까
궁리 중인 듯, 자그락자그락
자리를 바꾸고 싶은 외침 요란하다

오 촉짜리 등 같은 저 눈빛의 뚜껑
슬쩍 열어두고 돌아선다
햇살도 바르지 않은 이파리 반짝이도록
초록의 청산유수에 우북한 뿌리가 돋아나도록

   
▲ ⓒ부천타임즈

요즘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바닥에 빼곡하게 떨어져 있는 은행 때문에 불편한 지점이 있습니다. 벌써 어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지라 으깨져 있는 은행이 뿜어내는 냄새가 고약합니다. 저렇게 은행을 밟고 가면 신발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 밤새도록 악취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조심조심 노란 은행이 은하수처럼 깔린 구간을 지나갑니다. 그렇게 촘촘하게 은행알들이 떨어져 있는 요즘입니다.

최분임 시인의 시집 『실리콘 소녀의 꿈』을 꺼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가 바로 눈에 들어옵니다. 「은행나무를 일으켜 세우다」라는 시인데요. 필시 얼마 전부터 밟고 다녔던 은행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진노랑에 가까운 시집 표지마저 은행색으로 보입니다.

"음식물쓰레기를 쏟으려고 뚜껑을 열자/은행 알들 소복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떨어진 은행을 밟는 것이 불편한지라 깨끗하게 쓸어서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입니다. 양이 적으면 음식물쓰레기 틈바구니에서 눈에 띄지도 않을 텐데 그 양이 제법 많고 색도 노랗게 뚜렷해서 뚜껑을 "자마자 "生인지 주검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 "허공을 향해 와르르 쏟아내는/저 말간 말들”이 바로 들립니다.

"나무 한 그루를 잉태한 몸/허드레 악취 벗어던지고 나면/수백 년 가부좌로 속세를 굽어볼 수 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 늡늡할 수 있"겠다는 말일까요. "자그락자그락" 소리를 내며 "궁리"하는 "외침"이 "요란"합니다.

그 말들을 들었으니 어떻게 그냥 돌아설 수 있을까요. "오 촉짜리 등 같은 저 눈빛의 뚜껑/슬쩍 열어두고 돌아"섭니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햇살도 바르지 않은 이파리 반짝이도록/초록의 청산유수에 우북한 뿌리가 돋아나도록" 바라는 시의 마음입니다.

음식물쓰레기통 뚜껑을 열어두고 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왕 쓸어 담아 버릴 거라면 아파트 화단 한쪽에 버리거나 파묻거나 해주면 좋으련만 하필 음식물쓰레기통이었을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은행알들의 마지막을 생각해봅니다.

산자락에 떨어지면 "수백 년 가부좌로 속세를 굽어볼 수 있"는 중심과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마을의 좋은 자리에 떨어지면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 늡늡할 수 있"는 목숨과 자세를 가지고 있어도 이렇게 버려지고 마네요. 비슷한 몸집의 무수한 동료들과 함께, 고약한 냄새를 내뿜으면서, 썩는 냄새까지 나는 곳에서요.

그렇게 맞이하는 죽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해도 그 속에 "수백 년"을 살 든든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위로하고 위로받습니다. "한 마을의 수호신”"같은 특질을 스스로 알고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기는커녕 평범하거나 비루하게 죽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의연함을 갖추기로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은행알 같은 존재니까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 부천타임즈(http://www.bucheon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추천수 : 8
이 기사를 추천하시면 "오늘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생생포토]2019 부천시장기 배드민
[이종섶의 詩장바구니-35] 가족은
브라보! 부천시민뮤지컬 '레미제라블'
부천시 배드민턴 전용구장 신축을 기원
필리핀 이주여성 출신 전 국회의원 이
윤건영 청와대 상황실장, 부천 원미을
"부천시배드민턴협회로부터 공로상 받았
어두컴컴 골목길이 선사시대 이야기가
김명원 도의원, 제2경인선 은계·옥길
제22회 섬사랑시인학교 '팔미도등대
부천시 원미구 부흥로 315번길 14 포비스타 1414호 | 대표전화 032-329-2114 | Fax 032-329-2115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경기아00018 | 등록일:2005년 11월2일 | 사업자등록번호 130-19-41871
종별 : 인터넷신문 | 발행인겸 편집인 : 양주승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양주승
Copyright 2003 부천타임즈.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bu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