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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25]박경리의 '진 실'
"진실"을 밝히는데 왜 "치욕"을 느껴야 할까
2019년 09월 02일 (월) 12:21:58 이종섶 mybach@naver.com
   
 

진실
박경리

새빨간 칸나가
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본인 여선생은
해명하려는 내 뺨을 때리며
변명하지 말라 호통쳤다

항구에서는 뱃고동 소리
칸나는 더욱 붉게 타고
어린 나는
진실에 힘없음을
깨닫고 울었다

어른이 되어
더러
해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치욕을 느꼈다

차츰 나는
해명을 하지 않게 되었고
홀로 되었다
외로움은 치욕보다
견디기 힘들지 않았고
소쩍새 울음이나 들으며 산다

 

대하소설 『토지』의 박경리 선생이 일제 치하 학생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다. "해명하려"다가 오히려 "일본인 여선생"에게 "뺨을" 맞고 "변명하지 말라"는 "호통"까지 들어야 했던 사건이다.

그런 일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서 둘 사이에 있었다면 상처도 좀 덜 하련만 많은 학생들이 보는 교실 안에서 벌어졌으니 그 수치와 억울함이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새빨간 칸나가/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그것을 대변하면서 정서적 충격까지 안겨준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청각의 "뱃고동 소리"와 시각의 "칸나는 더욱 붉게 타고"있는 것으로 확장되고 이어진다. 그렇게 "어린" 박경리는 "진실에 힘없음을/깨닫고"서는 오래 "울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간간이 벌어져 그때마다 "더러/해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치욕을 느"껴야만 했다. "진실"을 밝히는데 왜 "치욕"을 느껴야 할까. 그러다 보니 "차츰" "해명을 하지 않게 되었고/홀로 되"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외로움은 치욕보다/견디기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0년 12월에 박경리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을 때, 이 시가 주는 울림과 깨달음이 참으로 컸었다. 인생의 화두 그 자체였다. 진실은 해명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 진실을 해명하려다가 치욕을 겪을 수 있다는 것. 그보다도 더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치욕보다 외로움을 견디기가 쉽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싫어서 무엇을 해명하려다가 외로움보다 더 큰 치욕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박경리 선생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긴다. '치욕을 견디지 않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라. 외로움은 치욕보다 견디기가 쉽다.' 섣부르게 나서다가 치욕을 견뎌야 하는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지한 인생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치욕보다 외로움'이라는 화두를 새긴 마음에 "소쩍새 울음"이 들린다. '외로움'이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반향을 일으킨다. '외로움은 힘이 된다'고,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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