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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24]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들리는 가로수길에서
2019년 08월 26일 (월) 13:05:33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들리는 가로수길에서
기 혁


나무는 살이 연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질 때에도
그 이름 위로 사랑과
저주가 덧씌워질 때에도 나무는

사람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 때문에 울지 않는다
사람 때문에 약속하고
사람 때문에 기억한다

밑동만 남긴 채 잘라버려도
나무는 환상통을 앓으며 자라난다
새가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의 발톱에 파인 허공에 눈물짓던
한 사람 때문에

나무는 죽어서도 숲을 이루고
들짐승을 키운다
저보다 살이 연한 사람들이 숨어들 수 있도록
낯빛까지 올라온 사연들을
어둠 속에 담아준다

나무는 음이 연하다 에덴에서도 그랬다

매 순간 인도人道를 향해 몸을 휘면서
어둠 속에 담아둔 것들을
사람보다 오래 옮기고 오래 그리워한다

   
▲ 트룰스 뫼르크(Truls Mørk)의 바흐 첼로 무반주 연주 음반

기혁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에서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마음을 잡아끌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제목에 나와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곡일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자주 듣는 곡이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요요마, 그리고 미셸 마이스키를 거쳐 지금은 트룰스 뫼르크(Truls Mørk)가 연주한 음반을 듣고 있다. 그 음원 대여섯 곡을 폰의 벨소리로 장치해놓아서 전화가 올 때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들이 울려퍼진다.

기혁 시인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시의 제목에 사용했으면서도 시에서는 일절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예 음악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당연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곡에 대한 설명이나 접목을 시도하기보다는 곡 자체의 속성과 작용을 시를 통해 구현하면서 음악과 시의 교차개념을 형성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편안하게 또는 깊이 있게 들으면서 나아가듯이, 그렇게 시를 읽으면서 나아가면 좋겠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뉘앙스와, 특정 부분에서 마음을 잡아채는 울림과, 감정의 상승과 하강을 경험하는 부분 부분을 들으며 지나가듯이, 그렇게 시를 읽으며 지나가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언어로 된 시의 문장을 읽으면서 첼로 모음곡의 선율과 화성으로 이루어지는 결을 동시에 느꼈으면 좋겠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어도 괜찮다. 그 곡을 변주한 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가로수에게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질 때에도/그 이름 위로 사랑과/저주가 덧씌워질 때에도 나무는//사람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사람 때문에 울지 않는다/사람 때문에 약속하고/사람 때문에 기억한다”라는 내용에 가슴을 적실 줄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자주 듣듯이, 시를 통째로 반복해서 읽으면서 가슴으로 음미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밑동만 남긴 채 잘라버려도/나무는 환상통을 앓으며 자라난다/새가 앉았다 간 자리/바람의 발톱에 파인 허공에 눈물짓던/한 사람 때문에//나무는 죽어서도 숲을 이루고/들짐승을 키운다/저보다 살이 연한 사람들이 숨어들 수 있도록/낯빛까지 올라온 사연들을/어둠 속에 담아준다"라는 내용에 마음을 적시다가 눈시울까지 차차 젖어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첼로의 선율이 그렇기 때문이다. 첼로 선율을 부분부분 잘라서 듣는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이 시 역시도 무반주 첼로 선율이 유려하게 흘러가듯 그렇게 흘러가므로, 같은 방식으로 읽고 또 읽으면서 즐겁게 감상하는 청중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무는 죽어서도 숲을 이루고/들짐승을 키운다/저보다 살이 연한 사람들이 숨어들 수 있도록/낯빛까지 올라온 사연들을/어둠 속에 담아준다"라는 내용은 또 어떤가. "매 순간 인도人道를 향해 몸을 휘면서/어둠 속에 담아둔 것들을/사람보다 오래 옮기고 오래 그리워한다"라는 내용은 또 어떤가. 기혁 시인의 시를 조각조각 분해하지 않고 전체를 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시의 용도와 가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시와 교호개념을 이루도록 장치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살이 연하다"라는 말이 참 좋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을 때마다 딱딱했던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 말랑말랑해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마음에 더 풍부한 감성이 깃들어 피돌기의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 "나무는 살이 연"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무는 음"도 "연하다." "살"이 연한데 "음"까지 연하다는 말은 나무의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며 존재와 발성이 같다는 말이다. 그 또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특성이자 감상의 결과다. 나무는 "에덴에서도 그랬"고, 태초의 창조에서 피조된 "나무"의 본질과 그 본질에서 나오는 "살"과 "음"도 그랬다.

부끄러움과 결심이 교차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즐겨 들으면서도 살과 음이 연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져도 살만 부드러워지거나 음만 부드러워지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부끄러움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바탕으로 한 기혁 시인의 시를 읽은 감상적 반성문이다.

더욱 살이 부드러워져야겠고, 가다가 살이 딱딱해지는 환경에 빠졌을 때는 얼른 부드러운 살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써야겠다. 음(말)도 갈수록 연해져야겠다. 큰 소리 거친 소리 같은 외면의 소리가 연해져야겠고, 불평과 험담이나 원망 같은 내면의 소리도 연해져야겠다.

핑계를 대지도 못하겠다. 기혁 시인이 숲속의 나무가 아닌 도시와 사람의 손을 타는 가로수를 장치해놓았으니, 환경 때문에 그렇다고 사람 때문에 그렇다고 핑계할 수도 없겠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저절로 연해지고 누구라도 연해진다. 그것은 진정한 연해짐이 아니다. 환경이 힘들고 어려울 때 살이 연해지고 음이 연해지는 사람. 사람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살과 음이 연해지는 사람. 이것이 거리의 가로수가 들려주는 말을 받아적은 것이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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