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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아의 여행스케치 ⑧]다케시다 도오리·오모테산도
2004년 10월 01일 (금) 00:00:00 배선아 기자 immyself@freechal.com

젊음과 활기, 개성과 패션이 어우러진 거리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가로수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어요, 아버지. 체크무늬 헌팅캡을 쓰고 지나가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꼭 아버지 같아서 이렇게 불현듯 엽서를 씁니다. 어디를 여행하시든 꼭 편지 한 장씩 부쳐 보내주시던 아버지를 닮아 저도 집을 떠나면 꼭 아버지께 뭔가를 쓰게 되네요. 혼자 간다고 걱정이 많으셨지만 아버지, 이름조차 선뜻 외워지지 않는 이 낯선 거리에서는 외려 혼자라는 사실조차 즐겁습니다. 염려 마세요. 손에는 길을 잃지 않도록 씩씩한 지도 한 장이 단단히 들려 있고 여정을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제 인생길에서도 항상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어딘가로 혼자 떠나길 그토록 바랐던 까닭은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모테산도’에서 막내딸 올림.(2004년 6월 ‘여행수첩’에 끼인 엽서 한 장)>
 
 
   
▲ 하라주쿠 역 맞은편에 있는 다케시다 도오리.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은 이 곳의 상징이다. 약 400m 길이의 작은 거리지만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독특한 스타일의 상점들과 함께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옷이나 액세서리 가게, 팬시 숍 등이 골목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다케시다 도오리(竹下通り)에는 유난히 10대 취향의 상품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청소년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기 캐릭터 상품이나 유명 연예인의 사진과 물건들이 강세를 떨치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하고 호기심 많은 청소년층이 구매력에 있어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 다케시다 도오리에서 본 여학생들의 교복차림. 시내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어 일본의 여학생 교복은 다 그렇게 짧은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된 유행 스타일로 허리선에서 일부러 접어 올려 입은 것이라고 한다

넘치는 인파들만으로는 부족한지 상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점원들의 톤 높은 인사소리에 그리 넓지도 않은 골목 안이 꽉 찬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디자인의 의상과 액세서리가 있는가 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첨단유행의 보세 옷도 있고 도대체 저런 옷을 입고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싶은, 말하자면 가면파티나 할로윈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의상만을 전문으로 파는 집도 있다.

코스프레-‘복장(costume)’과 ‘놀이(play)’의 합성어. 스타 혹은 만화주인공과 똑같은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꾸민 다음 표정이나 제스처까지 흉내 내는 일본 캐릭터세대의 대표적 문화-로 유명한 하라주쿠인 만큼 주말에는 역 주변에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 코스프레 숍 직원인 게이 양(?)과 함께. 빨간 가발과 매니큐어, 분홍색 입술을 칠한 그(!)는 친절하게 촬영에 응해주는 동시에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그러나 악의 없는 장난을 피워 관광객을 웃겨주었다.

구경거리들을 모두 돌아보느라 아픈 다리도 쉴 겸해서 다케시다 도오리 한 귀퉁이에 앉았다. 카메라를 꼭 쥔 채 행여나 나타날 지도 모를 코스프레 족들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허탕을 쳤다. 나중에 D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무래도 평일에는 좀 뜸하게 보이곤 한단다.   

파리, 밀라노, 뉴욕에 이은 세계적인 패션의 도시, 그 중에서도 하라주쿠라서 일까. 골목을 빠져나와 오모테산도로 들어가는 몇 블록 안 되는 거리 동안 수많은 개성만점의 멋쟁이들을 스쳐 지났다.

초여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겨울에나 애용할 법한 앵글부츠에 짧은 핫팬츠를 입은 아가씨나, 레게머리에 2차 세계대전 시절의 비행사들이 썼을 법한 구식 보안경을 끼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던 청년 등등 도처에 패션리더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젊음과 자유를 뽐낸다.  

하라주쿠 이외에 신주쿠나 롯본기 같은 다운타운에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지만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든 누구도 타인을 일부러 주목하거나 힐끔거리지 않는다. ‘요즘 젊은 것들은, 쯧쯔’ 하며 혀를 차거나 ‘어머, 쟤 옷 좀 봐’ 하면서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무심한 척 하면서 은근하게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눈초리조차 없다.

‘다양성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적 표출’에 대해 그들은 매우 여유롭다. '나와 타인의 다름'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젊은 세대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도 그들 곁을 지나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제 갈 길을 간다.

   
▲ 오모테산도는 청소년 취향의 다케시다 도오리와는 달리 고급스러운 카페나 레스토랑, 명품 숍들이 즐비한 곳이다

친구 D가 일전에 추천해준 바가 있어 오모테산도(表參道) 초입에 있는 장난감 쇼핑몰 ‘키디랜드’에 잠시 들렸다. ‘잠시’라고는 하지만 만화와 그 캐릭터들을 아직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2층 구석구석까지 둘러보느라고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쇼핑 바구니에 이것저것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아무 것도 사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저 진한 눈요기로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

오모테산도는 다케시다 도오리에 비하면 훨씬 한적한 편이다. 길가에 있는, 두툼하고 커다란 통유리로 전면이 비치는 카페가 언뜻 눈에 뜨인다. 모델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멋진 커플 한 쌍이 창가 테이블에 앉아 맑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이 꼭 영화 속 주인공들 같다. 아, 낭만적인걸. 아름다운 연인들을 보는 것으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오모테산도는 고급 브랜드 숍으로 유명한 곳이다. 로에베, 셀린, DKNY, 크리스찬 디올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품 숍이 굴비 꿰듯 이어져 나타난다. 먼지 묻은 배낭을 멘 꼬질꼬질한 행색으로는 진열된 상품을 구경하러 쇼윈도 근처에 가는 것만도 눈치를 봐야할 것 같다.

뿐인가. 고급 상점들의 중간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좌판에서는 간단한 기념품이나 저렴한 생활용품들을 진열해 놓고서는 와서 한 번 보고 가라고 주인들이 자꾸 손짓을 한다. 귀가 솔깃해지려고 한다. 안 되겠다. 견물생심이라고 나처럼 가난한 여행객에게는 빨리 벗어나야 좋을 곳이다.

   
▲ 오모테산도 보도 위에 일렬로 죽 세워져 있는 자전거와 모터바이크들의 행렬. 복잡한 교통사정과 주차난, 비싼 차량유지비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중교통 이용이 일반화되어 있고 젊은이들에게는 이륜구동차도 인기가 있다.

오모테산도 역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아오야마 도오리(靑山通り)로 접어든다. 지금부터 아오야마 대학에 들릴 계획이다. 젊고 발랄한 일본 젊은이들의 겉모습은 실컷 접해 보았으니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일본 역시 청년실업률이 만만찮다고 들었는데 동경의 대학생들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침부터 내내 걷기만 했더니 발이 다리와 무릎을 통해 좀 쉬자는 탄원서를 자꾸 보내온다. 그 동안 너무 걷지 않고 살아온 탓이다. 그래, 그래. 그 학교에 가면 아담한 벤치가 있을 거야. 그 때 또 쉬자구. 해의 기운 꺾인 지가 오래 되었다. 꾸물거릴 틈이 없다. 뿌루퉁해진 발을 달래면서 다시 길을 걷는다.

   

<배선아 님은>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작사가, 잡지 자유기고가 등으로 글을 쓰고 있는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위 기사는 국정브리핑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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