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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⑰] 그늘은 신발이었다
2019년 07월 08일 (월) 12:37:48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그늘은 신발이었다
이순주

나무는 일 년에 한 번 신발을 갈아신는다 잎이 무성한 나무일수록
신발의 문수가 크다

신발을 신고 나무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매년 그러하듯이 환희에서 우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
신발을 벗어 버린다

언젠가 나 기쁨의 반대말이기도 했던 때처럼 무작정
맨발로 걷다, 라는 말의 뜻은 아니다 새봄을 걷기 위해 기꺼이 바람의 뼈가 되어주는
벗다와 신다 사이 행간은

나무가 맨살인 발끝으로 가만히 구름을 만져보는 시간이다

매미들 울어대던 그늘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나무의 발가락이 보인다

그늘을 키워온 나무,
그늘이 바삭바삭 걸어갔다

맨발인 나무에 기대어 햇살에 비추인 나무의 발가락을 바라본다

나를 다녀간 신발들,
키워온 신발들이 걸어갔다

신발과 함께 사라진 날들
황홀히 꽃길을 걷는 신발의 연대기는 없나,
그늘을 갈아신으며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무에게도 신발이 있다. 나무는 그 신발을 신고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을 걸어간다. 나무의 신발은 그늘이어서 "나무는 일 년에 한 번 신발을 갈아신는다." 사람이 그렇듯 "잎이 무성한 나무일수록 / 신발의 문수가 크다."

크고 작은 그늘을 신은 나무들은 "환희에서 우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기도 하며, "맨살인 발끝으로 가만히 구름을 만져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에 그 신발을 신고 걸어가면 "매미들 울어대던"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기도 하지만, "그늘을 키워온 나무"의 성정은 변하지 않아 "그늘이 바삭바삭 걸어"가는 자세와 소리는 언제나 한결같다.

"맨발인 나무에 기대어 햇살에 비추인 나무의 발가락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다. 내가 나무를 찾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나무가 그늘을 신고 나에게 걸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나무에 기대어" 나의 그늘을 바라본다. 나무의 그늘과는 달리 내 그늘은 어둡다. '얼굴에 그늘이 있다'라는 말, '누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는 말은 무겁다.

그러나 그렇게 겪어왔던 그 모든 그늘은 "나를 다녀간 신발들"이고, 내가 그늘을 키우기도 하고 그늘이 나를 키우기도 하면서 함께 "키워온 신발"의 날들이다. "신발과 함께 사라진 날들" 중에 "황홀히 꽃길을 걷는 신발의 연대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무에게서 꽃은 떨어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꺾이고 부러진 상처는 평생을 가면서 옹이와 흉터로 남듯, 나도 좋은 일보다는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이 마음속 응어리로 남아 딱딱하게 굳어왔다. 그렇게 어두운 그늘의 연대기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련다. "그늘을 갈아신으며" 걸어왔다고. 무수한 그늘이 찾아오고 또 찾아왔을지라도 그때마다 그 그늘을 마다하지 않고 그 그늘 하나하나를 착실하게 신어가면서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그동안 신고 있던 신발이 맞지 않는지, 아니면 또 새로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인지,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초록 그늘 한 켤레가 보인다. 저 그늘을 기꺼이 신기로 한다. 나에게 잘 맞는 신발이었으나 맞지 않는다고 툴툴대었던 마음이 그늘을 거부했었을 터, 그 마음을 버리기로 한다. 신어보니 아주 잘 맞고 편안하다. 그늘이 고맙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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