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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⑯] '납작'..."한 생명체의 뜨거운 평면화"
2019년 07월 01일 (월) 10:17:17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납작
정순옥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나온 비서(秘書) 한 점
인주도 없이 온몸으로 마른 낙관을 찍고 있는
나방 한 마리의 저 고고학적 몰입
누른 자의 손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저를 눌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제 몸 먼저 낮췄을
한 생명체의 저 뜨거운 평면화

정말 그랬을까
제 한 몸으로도
어느 문장 하나라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어느 행간에 밑줄 하나는 그을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몰라서였을까
묶음의 악력 앞에서는 금방 고꾸라지고 말
낱장의 필연적 곤두박질을

숙인 고개로는 모자라 죽어라 엎드려 본 적 있다
직립의 꿈틀거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눌리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바닥에 존재의 비명을 쓴 적 있다
치솟는 불끈도 감추고 탱탱한 입체는 더욱 감추고
오늘 하루 살아남기 위해 제 꼭지 하나 지켜내기 위해
더욱 더 납작해진 적
있다, 한없이 가늘어진 적
많고
많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나방 한 마리"를 본다. "비서(秘書) 한 점"이기도 하고, "인주도 없이 온몸으로 마른 낙관을 찍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누른 자의 손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 저를 눌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제 몸 먼저 낮췄을 / 한 생명체의 저 뜨거운 평면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방의 "저 고고학적 몰입"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제 한 몸으로도 / 어느 문장 하나라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 어느 행간에 밑줄 하나는 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문제는 "문장 하나" 바꾸지 못하고 "어느 행간에 밑줄 하나" 긋지 못한 채 "묶음의 악력 앞에서" "금방 고꾸라지"면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나방 한 마리의 자세처럼 "숙인 고개로는 모자라 죽어라 엎드려"보는 사람이 있다. "꿈틀거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 더 이상 눌리지 않기 위해 / 온몸으로 바닥에 존재의 비명을" 쓰는 삶이다. "치솟는 불끈도 감추고 탱탱한 입체는 더욱 감추고 / 오늘 하루 살아남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의 「납작」이라는 시는 1연, 2연, 3연의 종합적 구성과 융합의 기능으로 인해 많이 아프다. 나방만 있었던들 그리 아프지 않았을 것이고, 납작 엎드려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왔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소재의 직관적 관찰에서 나오는 서술과 울림의 대비와 대조를 통해서 나방은 사람에게 사람은 나방에게 서로 필요한 내용과 서정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나방이라는 존재와 행위의 종결에 의해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아프고, 동시에 주변에 납작하게 엎드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그들의 자세와 종국의 마감은 문장 하나 바꾸지 못하고 밑줄 하나 긋지 못한 채 납작하게 눌려 죽어버린 나방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역시 많이 아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아픔이 낙심과 좌절이 아닌 것은 그 아픔에 작은 결기라도 조용히 서려 있는 것은 "나방 한 마리의 저 고고학적 몰입"이 자신과 당대에는 문장 하나 바꾸지 못하고 밑줄 하나 긋지 못할지라도 후대에 의하여 "꼭지 하나 지켜"낸 기록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납작해진"다고 해도 "한없이 가늘어진"다고 해도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완전히 납작해지고 만 미물의 흔적을 "한 생명체의 뜨거운 평면화"라고 명명하며 기록해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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