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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⑩] '나무와 나는'
'내가 멀리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
2019년 05월 20일 (월) 11:26:43 이종섶 mybach@naver.com>
   
▲ ⓒ부천타임즈

나무와 나는
김병호


나무가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이다

얼룩종달이새의 첫울음이나
해질녘에서야 얇아지는 남실바람의 무늬
온종일 경을 읽는 뒷도랑의 물소리들
나무는 그것들을 밤새 짓이겨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다음
오돌토돌한 뿌리에 불끈, 힘을 주고선
새벽녘, 달 지고 해 뜨기 전의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
온몸으로 털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멀리로 돌아온 그이들이
하루내 팽팽해진 연두빛 그늘로 몸을 바꿔
부르튼 발목과 젖은 무르팍을 어루만져주기에
나무는,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밤마다 제 안을 헐어 바람을 내보내고
젖은 날개의 날것들에게 제 몸을 내어준다

그리하여 나무가 거느린 빽빽한 어둠들이
그대의 기억을 흔들 때
혹은 그이들의 수척한 눈빛이
그대 그늘에 무심히 닿을 때
나무가 이름을 가지에 걸쳐놓고
하냥 먼 곳을 그리듯이
여전히 그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주말에 비가 내렸습니다. 이제 꽃의 계절은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나무의 계절이 시작되겠네요. 나무는 꽃의 무대를 시작부터 끝까지 진행하고 마무리하고 나서야 자신의 빛깔과 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니까요.

나무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이동성은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으로 드러나는데요. 출발부터 애틋합니다. 가까이 온 것도 아니고 떠나는 것도 아닌 "떠나지 못하는 까닭"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나무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 인데요. "얼룩종달이새의 첫울음이나 / 해질녘에서야 얇아지는 남실바람의 무늬 / 온종일 경을 읽는 뒷도랑의 물소리들"이 바로 나무가 켜켜이 쟁여놓은 기억들입니다.

기억도 안에만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무도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나무의 방식으로 나타냅니다. 나무는 기억들을 "밤새 짓이겨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다음 / 오돌토돌한 뿌리에 불끈, 힘을 주고선 / 새벽녘, 달 지고 해 뜨기 전의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 / 온몸으로 털어내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무들은 "하루내 팽팽해진 연두빛 그늘로 몸을 바꿔 / 부르튼 발목과 젖은 무르팍을 어루만져”주기도 합니다. "밤마다 제 안을 헐어 바람을 내보내고 / 젖은 날개의 날것들에게 제 몸을 내어"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은 "나무"가 아니고 "나무와 나는"입니다. 그래서 시의 마무리에 "나"의 독백이 나즈막하게 나옵니다. "나무가 거느린 빽빽한 어둠들"과 "그이들의 수척한 눈빛이 / 그대 그늘에 무심히 닿을 때"인데요. "나무가 이름을 가지에 걸쳐놓고 / 하냥 먼 곳을 그리"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그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무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사람만의 이야기도 아닌 "나무와 나"의 이야기에서, 나무를 통해 나를 말하는 서정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네요. 이정록 시인은 "마을이 가까울수록 / 나무는 흠집이 많다"(「서시」)고 했습니다. 그 흠집은 사람들이 낸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흠집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떠나지 않는 이유를 김병호 시인이 들려준 셈이라, "나무"를 "나"로 바꿔 읽어 봅니다. '내가 멀리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라구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아갈 때 나무처럼 좋은 것들을 기억했다가 들려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안 좋은 기억들로 인해 내 눈빛이 수척해질지라도 '그 이름을 가지에 걸쳐놓고 먼 곳을 그리는 나무처럼' 그렇게 그 사람을 기억해주고 싶습니다.

나무들이 보여주는 기억의 내용과 방식을 깊이 성찰하면서 나 자신을 다스리다 보면, 내 눈과 입이 나무의 눈과 입을 닮아가겠지요.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무지했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나 자신의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준 나무들이 고마운 날입니다.

   
▲ 이종섶 시인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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