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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기다리며 숨어들기 좋은 곳
2004년 09월 05일 (일)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 개축한 승선교 전경 ⓒ2004 최윤미

가끔 세상의 속도에 어지럼증을 느낄 때가 있다. 익숙하고 정든 것들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쉴 새 없이 그 공백을 메운다. 최신형 디지털 기기의 다양한 기능들을 만날 때는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서운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그런 변화들에 묻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소통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갈수록 얕고 단조로워지는 관계들이 늘 안타깝다. 그래서 더 혹독했던 여름이다.

일에 치여 휴가도 가지 못했다. 가을이 오기 전에 꼭 선암사에 다녀와야지 생각했다. 딱히 이유랄 건 없지만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래된 돌다리, 승선교를 직접 보고 싶었다. 초록색 숲 속에 걸려 있는 승선교의 모습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있었다. 왠지 세상 다 변해도 그 다리는 오래도록 그대로일 것 같아서 그랬는지….

   
▲ 개축한 승선교 전경 ⓒ2004 최윤미

 선암사는 순천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내가 생각했던 곳보다 좀더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한참을 기다렸다가 1번 시내버스를 타고 선암사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참 고스란하다. 이름에 순할 '順'자와 하늘 '天'자를 쓰는 동네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는데,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다.

승주읍을 지나 작은 계곡을 끼고 잠시 달리자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 입구에 닿았다. 여느 관광지들처럼 정신 없지도 않고 소박한 모습이 얌전했다. 너른 주차장을 지나고, 매표소를 지나 숲 속으로 들어서자 삼림욕장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폭신한 느낌을 주는 흙길, 계곡의 물소리, 건강한 나무들 속에서 금세 마음이 느긋해졌다.

   
▲ 큰 승선교, 작은 승선교 풍경 ⓒ2004 최윤미

그렇게 거닐 듯 오르니 고풍스런 돌다리, 승선교가 나타났다. 계곡 양쪽의 흙길을 잇고 있는 돌다리는 아래쪽에 하나, 일주문 바로 앞쪽에 하나, 모두 두 개가 있었다. 두 개인지는 몰랐는데, 아래쪽 것은 좀 작고 오래 되었고, 위쪽의 것은 규모가 제법 있었다. 큰 승선교는 태풍 '매미' 때문에 무너져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 세월의 흔적은 없어도 단아한 자연미가 느껴졌다.

   
▲ 삼인당 배롱나무꽃이 붉다 ⓒ2004 최윤미

  사람의 손이 닿았지만 인공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화강암만으로 쌓아 만든 아치형 다리가 참 고왔다. 시간의 무게 때문인지 아래쪽 다리에 더 정이 갔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저 다리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무엇일지, 잠시 아득해졌다. 작은 승선교와 큰 승선교 사이 왼쪽 길가에는 무너진 승선교의 화강암 덩이 몇 개를 전시해 놓았는데, 그 사이로 노란색 상사화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길이 더 고즈넉해졌다. 오래된 나무들도 많고, 깊은 숲 속의 느낌이 마음을 풀어놓게 했다. 선암사 가까운 곳에 작은 연못도 하나 있었는데, 알 모양의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든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이름이 삼인당이다.

삼인(三印)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뜻하는 이름으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걸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이 쿡 찔렸다. 변해가는 게 많아서 마음이 어지러운데,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다니.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 고 조용히 꾸짖는 것 같았다.

   
▲ 선암사 경내 풍경 ⓒ2004 최윤미

선암사는 여느 사찰들보다 아담했다. 낮은 담들이 많았고, 분홍빛 상사화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작고 오래된 여러 채의 건물들은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뒤로 안개에 휩싸인 조계산이 가파르게 버티고 서 있었다. 경내 한 편이 공사 중이어서 좀 부산스러웠지만 담장 하나, 문짝 하나, 곳곳에서 시간이 느껴졌다.

   
▲ 분홍빛 상사화 ⓒ2004 최윤미

시야가 확 트이지도 않았고, 널찍 널찍하지 않아서 그런가 기분 좋은 고립감도 느껴졌다. 머물 수 있는 만큼 오래 머물고,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돌아 내려왔다. 언젠가 내가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같아질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 소망을 담은 탑 ⓒ2004 최윤미

오마이뉴스: 최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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