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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아의 여행스케치 ④] 하코네 (II)
종업원의 몸에 밴 친절에서 맑은 녹차맛 느껴
2004년 08월 06일 (금) 00:00:00 배선아 기자 immyself@freechal.com



‘언젠가부터 세 가지 항목을 정해놓고 그를 얻기 위한 연습을 해 오고 있었다. 부드러워지기, 솔직해지기, 단순해지기. 나름대로의 매너리즘에 빠져 왠지 항상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는 자신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게 된 이후부터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 세 가지 모두가 자연스레 이뤄진 것이 바로 이번 여행에서가 아닌가 싶다. 보물섬을 찾아 갖은 풍랑과 모험을 겪는 것도 아니고, 무인도에 틀어박혀 지나가는 배에게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스스로 원하는 바를 오직 자신의 선택에 의지해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나를 부드럽게 하고 솔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두 가지 항목은 곁가지를 쳐낸 후의 질박한 단순함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음도 알게 되었다.’(2004년 5월 ‘여행수첩’ 중에서)

   
▲ 숙소 창 밖으로 보이는 하꼬네 유모토 지역. 온천과 관광으로 주 수입을 이루는 지역답지 않게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다. 밤이 되어도 흥청거리는 술집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배선아

 
D의 말대로 오다큐(小田急) 선의 로망스 카를 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차 안은 조용하고 좌석은 편안해서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이동시간은 대략 1시간 남짓. 잠을 청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라서 나와 친구 D는 지난밤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었다. 어릴 적 우리가 자란 동네가 얼마나 변했는지, 시기는 다를지언정 어머니의 죽음이 우리 각자에게 미친 영향이라든지, 지금은 소식이 닿지 않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에 대한 추억이랄지... 화제는 끊이지 않았다. 조금 목이 마르다고 느낄 무렵 기차는 드디어 하코네 유모토 역에 닿았다.     

여름에 접어들어서인지 햇살이 따끔거린다. 작은 지하도를 이용해 역의 반대편 길로 넘어오니 택시 서너 대가 대기 중이다. 굳이 차를 이용할만한 먼 거리도 아니었고 중간에 편의점에도 들려야 했기에 우리는 걷기로 했다. 느린 걸음으로 한갓진 대로변을 지나 하천이 눈 아래로 보이는 작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자 주택가가 나타난다. 예쁜 집들 사이로 꼬불꼬불하게 난 골목길을 따라 대략 15분 정도 걸었을까. 절간처럼 고요한 호텔 입구에 다다르니 뒷산의 새소리가 제법 청아하게 들린다.


데스크에서 간단히 체크인 수속을 마치자 지배인이 직접 룸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첫인사에서부터 엘리베이터 같이 타기, 방문 열어주기, 짐 옮겨주기, 유카타에 대한 간단한 설명까지 그의 태도가 얼마나 공손하고 사려 깊은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달달 외우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평상시에는 그저 몸에 고여 있다가 고객을 보면 탁 하고 바로 우러나오는데 그게 또 녹차의 맑고도 깊은 맛 같다고나 할까. D의 말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라고 하는데 돌이켜보니 식당이건, 지하철에서건, 아무튼 어디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건 ‘친절’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대단한 프로페셔널들이다.

일본어가 능숙한 D가 그런 나의 감상을 전함과 더불어 한국에서 온 작가라고 시키지도 않은 소개를 하는 통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더듬더듬 어쩌면 여행기를 쓰게 될 것 같다고 말하자 그가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실리게 되느냐고 물었다. 내가 웃었더니 명함을 건네면서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꼭 이메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이런 칭찬의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고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난 것도 처음입니다.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어쩌죠?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 되는 걸요.’ 그의 소박하고 순박한 성품에 저절로 커다란 웃음이 지어졌다. 그가 방을 나설 때 우리는 일본식으로 여러 번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 유카타는 남녀가 함께 입는다. 원래는 목욕 후에 입는 옷이었으나 요즈음에는 주로 여름용 가정복으로 입기도 한다고. ⓒ배선아
얼른 유카타로 갈아입고 짐을 정리한 후 호텔 순례에 나섰다. 식당과 몇 개의 자판기, 그리고 야외 잔디밭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들이 고작이었지만 쉬고자 하는 지친 나그네에게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D와 항상 장전되어 있는 여분의 수다 보따리를 풀고 나서, 온천 전에 저녁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복도나 식당에서 만난 대개의 손님들은 호텔에서 마련한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모녀끼리, 또한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끼리, 혹은 노부부끼리 다정하게 앉아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고즈넉해졌다.

주말이 아니어서인지 호텔 자체도 그다지 붐비지 않아 아무도 없는 온천 탕을 혼자 독점했던 일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호사스러웠다고 손꼽을 만한 것이었다. 탕 내부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우리 동네 목욕탕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수도꼭지 레버는 보이지 않는데 항상 넘실거리며 콸콸 쏟아지는, 그저 그렇게 하수도로 흘려버려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던 온천수만큼은 예외였다. 중간에 몇몇이 들어왔다가 나간다. 그들 모두가 잠시 탕에 몸을 담갔다가 가벼운 샤워를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때를 미는 것은 확실히 그들의 풍속은 아닌 듯 했다.

   
▲ 내부에서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노천탕. 실제 밤기온과 온천수의 기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점이 이채로왔다 ⓒ배선아

마침내 다시 혼자가 되자 통유리 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노천탕으로 나가보았다. 맑은 물에 대나무 잎들이 떨어져 있는 것이 제법 운치가 난다. 대나무 담장 너머로는 남성 노천탕이 있다고 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역시 반경 10m 안쪽으로는 오롯이 나 혼자인 모양이다. 물 위로 살살 김이 올라온다. 비가 왔다면 더 운치 있었을 것을.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빤히 쳐다보는데 별로 부끄럽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뒤마의 ‘삼총사’에 나오는 프랑스 왕비의 ‘검은 빌로오드 위에 놓여진 12개의 다이아몬드’ 같은 별들이었다. 혼자라는 이점을 살려 첨벙첨벙 헤엄도 쳐보면서 그간의 피로를 씻는다. 멀리 현해탄을 건너 이름도 모를 별들 아래, 그것도 인적 없는 노천탕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려니 그간 여러 모로 시달렸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들과도 이제는 안녕이다.

   
▲ 열쇠가 달린 라커 대신 등나무로 짠 바구니에 옷가지를 비롯한 소지품을 담게 되어 있다.ⓒ 배선아

행여나 누가 들어와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 가슴 조이며 온천탕 사진을 찍고 제 발 저린 도둑고양이처럼 방에 살금살금 돌아왔더니 D가 자고 있다. 지난달에 가족들과 함께 왔었다며 ‘난 온천이라면 그저 그래. 너나 실컷 하고 와’ 하더니 먼저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 먹고 또 탕에 가야지. 아, 맞다. 체크아웃하고 나서 화산에 간다고 했지. 음, 나도 어서 자야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바라본 창 밖의 달이 밝기도 밝다.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에서 부른 ‘문 리버(Moon River)’라는 노래를 아주 조그맣게 흥얼거려본다. 아, 떠나오길 정말 잘했다.

 

   

<배선아님은>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작사가, 잡지 자유기고가 등으로 글을 쓰고 있는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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