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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아의 여행스케치 ②] 신주쿠 네온사인 아래
2004년 07월 16일 (금) 00:00:00 배선아 기자 immyself@freechal.com

동경(動經) 140도, pm 11:04, 그리고 사람의 향기
 ‘어디론가 떠나기 전날 밤에는 쉽게 잠들 수가 없다.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넣은 듯한 옷가지나, 다음 날 약국에 들러서 사야하는 비상약품 목록이나, 아직 조금 덜 마른 운동화 같은 것들이 눈에 어른거려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온 집안의 불을 밝힌다. 이 모두는 어쩌면 핑계다. 팔을 걷어붙이고 물때와 곰팡이가 낀 욕조 청소에 땀을 흘리거나 전부터 미뤄온 서랍 정리를 하면서 뭐랄까, 일종의 전야제를 치른다. 훌훌 머리 속의 먼지를 털고 돌아올 나를 위해, 집 또한 정갈한 모습으로 반겨 맞아주기 바라는 마음 때문이리라.’
(2004년 5월 <여행수첩> 중에서)

   
▲ 숙소로 향하는 길에 바라본 신주쿠의 동쪽 번화가. 알록달록한 네온사인과 길게 늘어진 택시들이 여느 대도심 다운타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일본 특유의 화려한 아기자기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깨끗한 거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배선아

  입국장을 나온 시각이 밤 9시 15분 경. 서둘러 친구 D에게 전화도 걸어야 하고 곧바로 신주쿠(新宿) 행 리무진 버스도 타야하는데 둘 다 막막하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전화도 표지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엉터리 일어라도 나와 줘야 한다. 마침 잘 생긴 청년이 지나가기에 잘 됐다, 싶어 물었다. ‘스미마셍~. 덴화가... 도꼬니 아리마스까?(실례합니다. 전화가 어디 있어요?)’ 질문까지는 성공적이었던 듯. 뭐라고 하는데 ‘뭐? 좌회전 두 번, 우회전 한 번?’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물음표로 변신한 내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남자가 따라오란다. 멀리 가지 않아 공중전화기 두 대가 보인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동경에서 받은 첫 번째 친절이다. 그래, 나 역시 언젠가 전화 때문에 곤란해 하는 외국인을 만나면 핸드폰이라도 빌려주리다.

어느 나라를 가든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바로 이 공중전화기 사용이다. 어느 버튼을 눌러야 통화로 연결이 되는지, 동전은 얼마짜리를 넣어야 하는지 하는 것들은 오히려 애교스러울 정도의 고민이다. 빠른 현지 언어의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 땐 귀 안에서 장난꾸러기 달팽이 서너 마리가 뛰어노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칫 전화기가 돈만 꿀꺽 집어 삼키기 전에 일단은 끊을 수밖에 없다.

‘한국분이시죠?’ 아까 입국 수속 때 봤다며 참한 한국 아가씨가 말을 건넨다. 사정을 묻더니 전화보다는 먼저 버스표를 구입하는 것이 시간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어리바리한 나를 데리고 티켓 판매소로 향해 버스의 출발시간과 가격을 알아봐주었다. 마침 15분 후에 버스가 있었다. 꼬깃꼬깃한 메모지의 번호를 보더니 전화도 대신 걸어준다. 드디어 D와 연락이 되었다! 통화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주던 너무나 고마운 그녀가, 자신의 버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내게 손을 흔든다. 통통 튀듯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왠지 모를 상쾌함이 전해졌다.

   
▲ 리무진 버스 안에서 사에꼬 씨가 자신의 모바일폰 카메라로 찍어준 사진. 미소와 친절은 낯선 여행객에게 최고의 환영사다 ⓒ배선아

일단의 외국인들이 시끌벅적 관광버스에 올라타고 사라진 후에, 드디어 타야할 리무진 버스가 왔다. 짐표를 받아들고 냉큼 창가 쪽 좌석을 맡았다. 이어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살짝 가벼운 목례를 하더니 내 옆 빈자리에 앉는다. 어두운 도로 위를 달리던 버스가 몇 개의 음울한 빌딩과 각이 진 고가다리를 지난다. D에게서 소요시간에 대한 대강의 언질을 듣기는 했지만 막연한 조급함에 옆 자리의 동승 객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본인도 그 곳에서 내리는데 교통사정에 따라 변동은 있지만 대개 2시간 안쪽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란다. 오, 유창한 영어였다.

이후 사에꼬 씨와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 같다. JAL의 승무원인 그녀는 가끔 서울로 비행하기도 한다면서, 하루 이틀 정도의 자유시간에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어드바이스를 구해왔다. 한 살 차이의 우리들은 삶과 여행에 관한 각자의 시시콜콜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하고, 서울과 동경의 여러 명소를 비롯하여 한국식 목욕과 일본식 온천욕 등을 소개하고 메모하는 등 쉴 새 없이 이 우연하고도 기분 좋은 만남을 즐겼다. 마침내 버스가 동경 시내에 진입했을 무렵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명함을 교환했다. 이후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신주쿠 역 남쪽 입구. JR을 비롯 야마노테 선, 소부 선, 사이쿄 선, 도영지하철 신주쿠 선, 오에도 선 및 사철인 오다큐 선, 게이오 선, 세이부 신주쿠 선 등 각 철도가 집중하는 대형 터미널로 하루에 50만 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배선아

버스가 속도를 늦춘다. 신주쿠 역이다. 창 밖의 정류장에서 D가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여기야, 여기~.’ 격렬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D에게 사에꼬 씨를 소개하고 나서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눈 후 부탁해놓은 숙소로 향했다. 물가와 예산을 생각하면 당연히 민박집으로 향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여행 첫날만큼은 편안히 쉬는 것이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는 D의 충고 때문에 첫날은 근처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찾아간 곳은 전형적인 일본식 중급 호텔이었다. 좁고 네모난 상자 같은 방 안에 침대 하나와 침대 넓이의 1/2 정도 되는 조그만 미니욕실이 달려있을 뿐이다. 10년 전에 출장으로 단 하루를 묵었던, 지금은 거리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동경 외곽의 호텔과 모든 면에서 다르지 않았다. 가격은 우리 돈으로 9만원에 가깝다. 아까 리무진 버스표를 살 때에도 3000엔이라는-국내 리무진 버스의 3배가 훨씬 넘는- 교통비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터였기에 그제야 일본에 왔다는 제대로 된 실감이 들었다. 비싼 물가나 높은 환율이 자기 탓도 아닌데, 신용카드 영수증에 서명하는 내 옆에서 D가 괜히 미안해한다. 환영의 의미에서 자기가 한 잔 사겠단다. 야호, 입이 찢어진다.  

 

   
▲ 일본의 생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가끔 사진으로나마 풍부한 거품과 부드럽고 순한 맛을 떠올려본다 ⓒ배선아
  룸에 냅다 가방을 내던져놓고 D와 호텔 맞은 편 거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리타공항에서부터 신주쿠 스테이션까지 내가 만난 ‘친절들’에 대해 자랑을 했더니 D가 농을 친다. ‘네가 많이 불쌍해 보였나봐.’  우리의 발길을 잡은 ‘와타미’라는 곳은 전국에 체인망을 가진 보통의 주점이었지만, 맥주 애호가인 내게 그 집 생맥주의 특별난 맛은 오,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래,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는가?' 둘 다 녹녹치 않은 사정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서로를 알아주는 친구사이라 만나면 제일 먼저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면서 우리의 볼도, 동경의 달도 점점 더 불그스름해져만 갔다. 어쩌면 살다보니 단련이 되어 잘도 감추어지는 서로의 촉촉한 눈시울까지도.

● 여행 Tips!

   
▲ 일본 지폐와 동전들. 워낙 비싼(?) 돈들이라 쓰기 전에 기념으로 한 방 찰칵!ⓒ배선아

일본 공중전화기의 동전주입구에는 10엔과 100엔 표시가 되어 있다. 먼 장거리 전화가 아니라면 통화 전에 가급적 10엔짜리 동전을 많이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세계 어느 나라건 대개의 동전전화기들이 그렇듯이 100엔을 넣고 20엔만큼 통화를 했다 하더라도 80엔의 거스름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도시가 주는 흥분감과 정신없음 때문에 처음 이틀 동안은 이런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100엔 동전을 너무 낭비해버렸다. 동경 시내에는 곳곳에 100엔 숍이 있는데 그 돈이면 레토르트 카레 한 봉지나 가쯔오부시(국물 맛을 내는 요리 재료) 한 봉지, 통조림 캔 하나 정도는 구입할 수도 있는 적지 않은 액수임을 후일 알게 되었다.   

   

<배선아님은>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작사가, 잡지 자유기고가 등으로 글을 쓰고 있는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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