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민수 기자

▲ ⓒ2004 김민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초가집 마당에는 화초를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어머님이 심어 놓은 꽃들이 시절을 좇아 피어났습니다. 지금도 아스라이 생각나는 꽃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알록달록 예쁜 채송화, 향기가 그윽한 백합, 누님들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던 봉숭아, 접시를 쌓아 놓은 듯한 씨앗을 가진 접시꽃, 맛난 꿀을 듬뿍 담고 있던 깨꽃, 화전을 만들어 먹던 진달래, 예쁜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금낭화, 붉게 익으면 씨를 빼내고 꽈악꽈악 꽈리를 불던 꽈리….

그리고 마당 한켠 작은 텃밭에는 파, 부추, 쑥갓, 돈나물, 아욱, 상추, 고추, 가지 등이 고루고루 심어져 있었죠. 아침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는 풋풋한 고추며 상추를 뜯어 아침상에 올리면 빨간 고추장 하나만으로도 풍성했던 풋풋한 밥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채소들 역시도 수수한 꽃들을 피웠습니다. 둥그런 공 같은 꽃을 피우던 파, 보랏빛 작은 공을 닮은 부추, 노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쑥갓, 별처럼 노란 꽃을 피우는 돈나물, 은은한 보랏빛의 작은 아욱, 노란 꽃을 총총히 달고 있던 상추, 아이보리색의 고추꽃, 보랏빛 가지….

▲ ⓒ2004 김민수

 봄이면 갈라진 흙담을 메우기 위해 작두로 짚을 잘근잘근 썰어 황토를 버무려서 쓱쓱 벽에 발라주었고, 짚으로 지붕을 잇기도 했습니다. 초가지붕은 참새들의 보금자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길어 출출하던 겨울밤이면 개구쟁이들이 깡통에 촛불을 밝혀 사다리를 초가지붕에 기댑니다. 초가지붕과 처마사이의 아가 주먹만한 구멍에 고사리손을 집어넣으면 고이 자던 참새들이 놀라 짹짹거리고, 그 참새를 잡아 연탄불에 구워먹던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간혹은 참새가 아닌 쥐가 잡히는 바람에 놀라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연탄불에 굵은 소금을 뿌려가며 자글자글 구운 참새의 맛을 한번 보고 나면 매일 밤 참새잡이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까워 집니다.

초가지붕의 처마. 그 곳에는 시레기나물, 옥수수, 곶감을 위시해 갖가지 농기구들이 걸려있거나 기대어 있었습니다. 삼태기에서부터 호미, 낫뿐 아니라 심지어는 소가 끄는 쟁기를 처마 밑을 돌아가며 걸어두기도 하고, 기대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 땐 늘 보던 풍경이라 밋밋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 ⓒ2004 김민수

따스한 봄날이나 여름날에는 바람이 온 집안에 잘 통하라고 부엌문이며 방문이며 죄다 열어 놓습니다. 그 문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들은 눈길만 주면 액자에 담긴 한 폭의 수채화요, 유화처럼 보였습니다.

마당이나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뒤뜰의 풍경은 주로 장독대나 조그만 텃밭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풍경은 계절의 변화와 일기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죠. 초가의 가옥구조가 거의 비슷했으니 친구들 집에 가보아도 거의 비슷한 풍경이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바람을 타고 흙벽 대신 시멘트 벽돌과 붉은 벽돌로 좀더 편리하고 튼튼하고 반듯하게 벽을 세웠고, 스레트지붕들이 초가지붕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게 변했지만 삶의 질은 얼마나 나아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초가집은 갈라진 벽을 황토로 메우고, 짚으로 지붕을 갈아주고, 창호지를 바르면 다시 새 집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후로는 이전 것들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새 집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 ⓒ2004 김민수

 지금이야 스레트지붕과 초가지붕 중에서 택하라면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초가지붕을 택하겠노라 하실 분들도 많을 것이고, 벽돌과 흙벽돌 중에서 택하라면 흙벽돌을 택하실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단순한 향수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가장 편안한 거처가 된다는 것, 자연적인 소재가 많이 사용된 거처가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죠. 방문만 열면 늘 새로운 풍경, 얇은 창호지와 설렁설렁한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려오던 자연의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아니지만 저는 지금 그와 비슷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면 오름이 보이고,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면 팽나무와 시절을 좇아 피어나는 각양각색의 꽃들도 보이고, 날씨가 좋은 날 뜰 앞에 서면 한라산도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 감수해야 할 불편함은 있지만 집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유년 시절, 장독대는 아침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습니다. 항아리에는 간장과 된장, 고추장이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고 간장에는 숯이 동동 떠있고, 된장에는 무나 고추가 들어가 있고, 고추장에는 마늘쫑이나 더덕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이 논밭에 나가 계셔도 찬밥만 있으면 펌프에서 막 퍼 올린 냉수와 항아리에서 막 꺼내온 짠지 하나로 가장 맛나게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배가 든든해 지면 부모님이 계실 논이나 밭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고, 혹시 만나지 못해도 오가는 길에 피어있던 들꽃들과 눈도 맞추고, 민들레 줄기를 꺾어 풀피리도 불고 냇가에서 가재도 잡고 놀기도 했습니다.

▲ ⓒ2004 김민수

이런 유년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학원과 학교만 오가는 아이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흙 한번 밟지 못한다는 도시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어떤 유년의 시절을 추억할까요? 어른들이 너무 우리의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내가 손수 지을 수 있다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런 집을 짓고 싶습니다.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리지 않는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www.freechal.com/gangdoll을 방문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