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민수 기자    

▲ 보리 ⓒ2004 김민수

 
두 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한 계절이 됩니다. 꽃이 피고, 들판마다 연한 초록빛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봄이 온다고 합니다. 봄비를 흠뻑 맞은 나무들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금방이라도 터질 듯 연한 푸름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더디 오는 것 같던 봄이 어느 날인가 '이젠 봄이구나!' 하고 감탄사를 연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비로소 완연한 봄입니다. 이 계절은 한 달여 봄 하나만의 계절을 간직하다, 다시 봄과 여름이라는 두 계절의 공존하는 시간이 옵니다.

보리밭에 섰습니다. 아직 누렇게 익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해 이맘때 너무나 오랜만에 보리밭을 보고 어린 시절을 추억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마음을 졸이며 보리이삭을 씹어보기도 하고, 이파리로 풀피리도 불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설레던 풍경이었는데 이젠 나에게도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는지 그때만큼의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곁에 있을 때 그 소중함을 알기란 이렇게 힘든 것인가 봅니다.

▲ 유채와 호랑나비 ⓒ2004 김민수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날기 시작하면 봄이 왔음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한 해를 시작한 후 첫 번째로 보는 나비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서 그 해 운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잘 기억이 안 나고 흰나비를 처음으로 보면 집안 어른신 중 누군가 돌아가신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대체로 가장 흔한 노랑나비를 먼저 보았지만 아주 가끔씩은 흰나비를 먼저 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애써 점이 있었다는 둥, 미신이 불과한 것이라는 둥 위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흰나비를 보고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정말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정말 그렇구나!' 하며 죄책감에 몇 날을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2004 김민수

좀 우스운 추억이지만 그래서인지 기를 쓰고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길 간절히 원했답니다. 그러다 흔한 노랑나비가 아닌 호랑나비를 가장 먼저 보는 봄날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도 갖곤 했었습니다.

그 호랑나비를 유채꽃이 만발한 노랑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유채밭에서 만났고,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뭔가 좋은 일들이 나에게도, 이 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메뚜기의 짝짓기-작은 것이 숫놈입니다. ⓒ2004 김민수

아직은 말라있는 억새풀밭 사이사이 고사리들이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양지꽃과 봄나물들이 그 억센 억새풀을 비집고 올라옵니다. 그 사이 철저하게 위장을 한 메뚜기 한 쌍이 짝짓기를 하고 있습니다.

'봄이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뛰어다니고 짝짓기를 하니?' 이 넓은 들판에서 이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만 한 자연의 세계입니다.

▲ 큰개불알풀꽃과 부전나비 ⓒ2004 김민수

큰개불알풀꽃에도 부전나비가 찾아왔습니다. 개불알풀꽃의 다른 이름이 '봄까치꽃'이라고 한다네요. 더 예쁜 이름이니 그 이름을 불러주자는 분도 계십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불경스러워 보이는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이 더 좋습니다.

이 세상은 이름만, 무늬만, 겉모습만 그럴듯한 가짜가 얼마나 많습니까? 번지르르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는 얼마나 되는지요. 겉으로는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 같지만,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조차 부끄러움으로 알고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진짜가 아닐까요?

▲ ⓒ2004 김민수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합작품에 반기를 든 제주는 4·3항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동안 숨 한 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쉬쉬하며 부끄러운 짓을 한 것 마냥 살아왔던 그 오랜 세월이 벌써 56년이나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짓을 했던 이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갔고, 진정 이 나라의 부정과 부패에 대항했던 이들은 힘 없고,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변방의 삶을 강요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번 봄에는 우리 역사에도 완연한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역사를 어둠으로, 겨울로 몰아가려고 하는 이들이 아예 이 역사의 계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피어나야 할 꽃들도 있고, 잠에서 깨어나야 할 곤충들도 있습니다. 어제 내린 봄비에 마당의 팽나무도 연한 잎을 낼 준비를 거반 마친 듯 하고, 배나무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오는 봄, 그 누구라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봄도 역시 그렇겠지요.

▲ 금잔화와 배추흰나비 ⓒ2004 김민수

▒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