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윤태(poem7600) 기자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던 가수가 어느 날 갑자기 TV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분이 묘해진다. 10여년만에 다시 나타나 당시의 히트곡을 부르는 가수를 보면 "저런 때가 있었지"라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영화나 비디오 소개 프로그램에서 20, 30년전의 필름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늙은 배우와 당시 젊었던 배우의 모습을 비교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흑백 필름에서 보았던 인물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땐 슬그머니 그(그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모두 세월이 흐른 탓이다.

무릇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 폭설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지 며칠이 안 된 것 같은데 들판에는 푸른 것들이 제법 늘어나고 있다. 세월이 유수 같다는 느낌이다. 지금 냇가에 가면 얼음은 모두 녹아 없어졌을 테고 그야말로 유수 속에서 한들거리는 버들강아지가 볼 수 있을 게다. 세월이 '유수같다'는 표현보다는 '유수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무상함을 느끼는 계절이다.

봄의 전령이라 할 수 있는 봄꽃, 즉 벚꽃, 진달래, 개나리 등의 개화소식이 남쪽 지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꽃처럼 밝고 명랑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화사한 자태를 드러낸 꽃이 눈앞에 펼쳐 있지 않더라도 '꽃'이라고 발음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게 바로 봄꽃이다.

진달래, 개나리, 벚꽃 등은 꽃부터 피고 나중에 이파리가 나온다. 샛노란 개나리가 길게 드리워진 담벼락을 지나간다. 등하교길, 출퇴근길에 하루 두번씩 이 길을 지나는데 어느날 문득 들여다 보니 푸릇한 색이 짙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노란색은 약해지고 비라도 한번 내리면 노란색은 영락없이 파릇한 색으로 변해 있다. 한순간, 한 느낌으로 계절이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녹음 속의 풋풋한 냄새가 머리 속까지 파고드는 계절이다.

여름의 시작은 역시 장마이다. 시골에서는 차양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크게 들려 밤잠을 설치고 도시에서는 차바퀴에 부서지는 빗방울소리가 처량하게까지 들린다. 지루했던 장마도 어느덧 강한 햇발에 맥을 못 춘다. 집 앞에 질퍽한 공사장 황토도 수분을 빼앗기고 단단히 굳어 있다. 장마철에는 조심스레 걸어 다녔지만 이젠 흙물을 튀길 일이 없어 마음마저 개운하다. 땅은 비온 뒤 더 단단해진다는 옛 교훈이 이때처럼 딱 들어맞을 때도 없다.

한여름의 땡볕은 정말 지겹다. 머리가 '띵' 해진다. 얼른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겨울이 되면 이 사람들은 여름을 그리워한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생각인가? 여하튼 여름이란 계절은 밤을 잘 보내야 한다. 밤마다 더위와 모기와의 전쟁으로 정작 직장이라는 삶의 전쟁터에는 그 의욕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달 정도만 지나면 그 의욕이 자연적으로 되살아날 테니 말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이것도 역시 한순간이다. 자다가 싸늘한 느낌이 들어 깨보면 감기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한여름 같은데 새벽녘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때가 8월 20일 정도이다. 흔히 "찬바람 났다"고 표현한다.

이때부터 하늘색도 파란색으로 변해간다. 밤송이가 쫙 벌어지는 9월 말 10월초를 지나 11월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허전해진다. 그 너르고 빡빡했던 플라타너스 나무에 허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낙엽이 창밖으로 날리운다. 공중으로 한껏 솟았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 자신이 그런 것 같은 처량함을 느끼게 된다.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그래서 고독해지고 싶다는 계절, 가을의 절정 속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변화를 설명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다른 계절의 변화는 시나브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면 되지만 가을과 겨울의 바통 교체는 애매하다. 다만 낙엽이 다 떨어지고 어느 날 비가 한번 내리고 나면 기온이 뚝 급강하된다. 겨울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지만 한 겨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첫눈이 오는 순간 "겨울이 됐구나"라고 느낀다. 첫눈은 대체로 예고돼 있다. 흐른 날이 있을 테고 그날 추우면 눈이요, 따뜻하면 비가 내리는 것이다.

겨울의 혹한은 참기 힘들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이가 갈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더운 여름날 겨울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도 막상 겨울이 되면 여름을 그리는 법이다. 위에서는 이율배반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심리 아닌가?

다음은 봄으로 가는 중이다. 겨울에서 봄이 됐음을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방안에서다. 필자의 경우는 그렇다. 거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했던 보일러에 변화가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온도인데도 갑자기 방이 데워지고 온수도 더 뜨거워진다.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이는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영상 12도를 유지하는 지하수가 30도가 넘는 여름에는 시원하게, 영하 10 아래로 떨어지는 겨울철에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과학적이든 자연적이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세월이 무상함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각자 다르겠지만 뒤들 돌아보았을 때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순 없는 일이다. 단지 빠르고 느리다는 각자의 느낌이 다를 뿐이다.

다음은 필자가 자작한 시이다. 이 시는 한문장이며 한 행에 한 계절씩 담아 4계절을 노래했다. 제목은 <초로인생>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같은 인생으로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초로인생

꽃망울 소리 들으러 봄밖에 나가보니 이운 꽃잎 그 자리에(봄)
사물거리는 매미 한 마리 파르르 날갯짓으로(여름)
가을 깊숙이 떨어지는 단풍 하나 잡으려다(가을)
숫눈속에서 삐짝 얼어 버린 낙엽 한 조각 밟고 말았네(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