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입맛 다시는 소리가 줄어들지 모르겠다. 주요 소주 제품들의 알코올 도수가 최근 1도씩 낮아졌기 때문이다.

진로, 두산, 대선주조, 금복주, 선양주조 등 전국의 주요 소주회사들이 최근 일제히 주력 제품의 알코올 도수를 22도에서 21도로 1도씩 낮추었다. 바야흐로 ‘21도 소주 시대’가 열렸다.

이어 소주업계 1위인 진로가 주력제품인 ‘참이슬’의 알코올 도수를 22도에서 21도로 낮춘 신제품을 2월 중순 출시했다.

“도수 낮을수록 더 좋다”

두산도 주력제품 ‘산(山)소주’의 도수를 역시 1도 낮춘 21도짜리 리뉴얼 제품을 2월 하순 출시했다. 두산 신동규 차장은 “신제품은 기존제품보다 더욱 부드러운 맛과 향을 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21도짜리 소주 제품은 충남에서 서울로 북상한 뒤 다시 영남지방으로 내려갔다. 부산의 대선주조는 알코올 도수를 21도로 낮춘 새 시원소주를 출시했다. 회사 측은 “국내 최초로 음이온 처리 공법을 도입, 주질이 더욱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대구의 금복주도 알코올 도수를 현재의 22도에서 21도로 낮춘 ‘참소주’ 리뉴얼 제품을 출시했다.

이처럼 소주 도수가 떨어진 것은 최근 독주를 기피하는 소비자들의 기호(嗜好) 변화와 맞물려 있다. 두산 이계하 부장은 “최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하는 웰빙 트렌드가 소주업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로 전영태 차장도 “저도주를 선호하는 소비자 트렌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제품을 리뉴얼했다”고 말했다.

실제 두산 측이 신제품 출시에 앞서 소비자 1만385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저도주 선호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기존 22도 제품과 21도 신제품, 24~25도 제품 3가지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21도 신제품이 좋다는 사람(3352명ㆍ24.2%)이 24~25도 제품이 좋다는 사람(2022명ㆍ14.6%), 기존 22도 제품이 좋다는 사람(2001명ㆍ14.4%)보다 더 많게 나타났다. 특히 21도 신제품보다 더 약해질수록 좋다는 사람(6479명ㆍ46.8%)이 절반에 가까워 앞으로 소주 제품의 알코올 도수는 더욱 낮아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진로 측도 “소비자 조사에서 소주 애주가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알코올 도수는 20도로 나타났다”면서 “다만 이번에는 21도에서 소비자들의 욕구를 맞추기로 했다”고 21도짜리 개발 배경을 설명했다.

소주회사들이 알코올 도수를 낮추면서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은 역사가 유구하다. 1924년 출시되기 시작한 초창기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35도에 이르는 증류식 소주였다가 1965년 알코올 도수를 30도로 떨어뜨린 희석식 소주로 전환됐다.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99%인 주정에 물을 타 희석해서 만드는 제품으로, 증류식인 전통소주와는 제조 방식이 다르다. 현재 국내 주요 소주업체들의 제품은 모두 희석식 소주이며, 일부 전통 소주업체들은 증류식으로 소주를 제조하고 있다.

30도짜리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20도대로 들어선 것은 1973년. 당시 진로는 일거에 알코올 도수를 5도 내린 25도짜리 제품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소주는 막걸리를 밀어내고 한국인의 국민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1996년 ‘순한 소주 경쟁’개막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1973년 이후 20여년 간 25도를 유지했다. 알코올 도수 하향 경쟁이 다시 불붙은 것은 1996년. 영남권에서 23도 소주가 출시되며 ‘순한 소주 경쟁’이 시작됐다. 23도 소주는 업계 1위인 진로가 1998년 23도짜리 참이슬을 내놓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23도짜리는 1999년 소주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주력 제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어 2000년엔 지방 소주 회사들이 잇따라 22도짜리를 선보이며 22도 소주 시대를 새로 열었다. 무학 화이트, 대선 시원, 선양 그린청 등이 당시 나온 22도짜리 제품들. 22도짜리는 이듬해 진로와 두산이 가세하면서 소주 시장의 주력제품으로 변모했다.

소주회사들이 지속적으로 알코올 도수를 낮추는 것은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의 호응이 뒤따라줘 매출 증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3도짜리가 시장을 장악한 1999년은 총 29억3600만병이 팔려 전년(23억7200만병)보다 무려 23.8%의 증가세를 보였다. 또 22도짜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2001년엔 27억병이 팔려 전년(23억9300만병)보다 16.6% 증가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22도짜리가 주력이 된 2001년엔 1조7078억원(출고 기준), 2002년 1조9109억원으로 증가했으며 지난해엔 사상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한 2조1229억원을 기록했다. 보다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소비자들의 기호 변화를 즉각 반영시키지 못한 제품들은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물론 소주의 판매는 알코올 도수뿐만 아니라 소주가격 변화, 경기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기존제품보다 부드러워진 소주 맛도 시장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업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여성 애주가가 늘고 있는 것도 소주의 도수 하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이 전체 소주 소비량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7% 안팎으로 최근 몇 년 간 꾸준히 증가했다. 여성 애주가 중에선 20대 여성이 가장 비중이 크다. 남자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가장 많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건강을 중시하는 최근 세태 변화도 소주의 저도화(低度化)를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술이 비만을 유발한다는 건강정보가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술에 함유된 알코올은 1g당 7㎉의 열량을 낸다. 23도 소주 한 병엔 579.6㎉의 열량이 들어 있는 셈이다. 저도주는 그만큼 열량도 줄어들어 건강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알코올 도수 저하로 소주를 입에 넣을 때의 ‘부담’도 줄어들어, “캬~”라는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즐거운 비명’은 앞으로 점점 듣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올 법하다. 또 독한 소주를 즐기는 독주파들은 “물 많이 탄 소주는 싫다”며 항의시위라도 할지 모르겠다.

◆ 진로소주, 법정관리 진로 먹여살린다

‘기업은 망해도 제품은 살아남는다.’

진로그룹은 한때 재벌 순위 30위의 대기업이었다. 지금은 부도가 나 법정관리 신세다. 회사도 ㈜진로 하나 달랑 남았다. 하지만 현재 재계에선 진로를 인수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모두 회사의 가치를 지키고 있는 진로소주 덕분이다.

진로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진로가 만들어내는 소주 제품 때문이다. 국민주로 사랑을 받는 소주 업계에서 진로소주를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 없다.

지난해 진로의 소주판매량은 15억8172만병(360㎖ 기준)으로 전년(14억8635만병)보다 6.4% 늘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이는 지난해 소주 전체 판매량 증가율(4.6%)보다 높은 것이다. 매출이 늘어나면서 시장점유율도 창사 이래 최고치인 54.5%를 기록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은 소주 2병 중 1병은 진로소주를 마신 셈이다. 시장점유율은 1999년 38%에서 2000년 51.4%, 2001년 52.6%로 계속 높아졌다.

법정관리로 마케팅 활동에 제약이 있지만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6433억원, 1675억원을 기록했다. 소주 하나로 16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다만 회사가 지고 있는 엄청난 부채에 대한 금융비용 때문에 회사는 아직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진로소주의 진가는 일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979년 진출한 일본에서 진로소주는 꾸준히 시장을 파고들어 1999년 1위를 차지한 이후 계속 1위 자리를 고수하는 상태. ‘JINRO’라는 브랜드는 브랜드별 순위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