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고태진 기자
 

1시간을 넘긴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예상했던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동안 노 대통령이 보여줬던 태도에서 더 강경한 면을 보여주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야당에 맞서 오히려 먼저 탄핵을 철회하면 야당과 타협하고 사과하겠다고 한다.

또다시 판에 박힌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의 성명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들어보지 않아도 내용은 훤히 예상된다.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서로 상대의 말에는 귀를 막고 자신의 말을 쏟아내는 데에만 급급한 모습들이다.

솔직히 국민들은 불안하다. 사상 초유의 헌정 중단이 우려된다. 야당들이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서슬이 퍼렇게 날뛰고 있다. 국회 내에서 수가 많으니 어쩔 수 없다. 한달 남은 '제대 말년'의 '막가파' 국회지만 국회의 권한이고 합법적 수단이다. 이럴 줄 모르고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회 다수 야당과 맞선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정치 미래의 발전을 위해 소신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는 것은 좋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군에 죽음으로써 맞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적어도 대통령이라면 국민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야당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좀 더 큰 숲을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기자회견이 그런 자리다. 국민들은 이 혼란스런 시기에 대통령이 맘먹고 기자회견을 한다니 대통령이 국민들의 근심을 덜어 주려니 기대하고 TV 화면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망이다. 대통령도 자신의 이야기에만 열중했다. 야당이 아닌 국민들에게 이 혼란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껏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 민주당과 정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오늘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야당과 또다시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나눈 데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지금 야당들은 제 정신들이 아니다. 노 대통령 당선 후에도 그나마 자신들이 그 동안 누려왔던 기득권과 권력을 한달 뒤에는 송두리째 박탈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다.

야당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고 사과하라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불안과 걱정, 혼란을 덜어줄 수 있는 기자회견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오늘도 "마음을 비웠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등의 발언으로 대통령직에 연연할 욕심이 없음을 밝혔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강직한 면모로서는 좋다. 하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를 개인의 성품 문제를 넘어서야 하는 자리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이런 발언을 접할 때마다 지극히 불안하다. 어렵더라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해야지 그만둘 수도 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자 회견에서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국민들에게만큼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엄청난 혼란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헌정 중단의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어야 했다. 사과를 먼저 하라는 야당에 맞서 탄핵을 먼저 중지하라는 대통령의 안중에는 자신의 원칙과 소신만 있고 국민들은 없는 것 같다.

국민들도 야당의 탄핵이 부당하다는 것을 안다. 여론 조사의 결과가 그러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한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라는 것이 또한 국민들의 여론이다.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은 대통령의 위신에 흠이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 도중 "부끄럽다", "구차스럽다"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대통령이 그러면 국민들도 부끄럽고 구차해진다. 하지만 정작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더 부끄러워 해야할 사람들은 기세가 등등하다. 그래서 국민들은 분통이 터지고 더 부끄러워진다.

그런 면에서 대통령의 억울함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은 국민들 전체의 심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지금 국민은 거대 야당의 횡포에 맞선 소수 여당의 '투사 대통령'보다는 우선 불안과 걱정을 덜어 줄 대통령을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