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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진 자리에 봄이 찾아왔네
[남도의 봄소식] 모든 절망한 것들이 천천히 날아오를 때
2004년 03월 09일 (화)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 향일암에 떠오르는 장엄한 해 ⓒ2004 김은주

오마이뉴스: 김은주(nuri10) 기자     
 
 내가 잠든 사이에도, 기차는 쉬지 않고 남쪽을 향해 달렸다.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잠깐씩 실눈을 뜨고 창 밖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깊은 어둠을 가르고 집으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고되지만 정겨워 보였다.

나의 여행은 집을 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길 위에서 오랫동안 서성일 것이 두려웠다.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결국 위화의 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 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혼자서 길 위에 서게 된 나, 조금은 외롭기도 했던 모양이다. 밤 10시 50분에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새벽 5시 10분, 여수에 도착했다.

"밤을 새운 긴 기차 여행 끝에 당신이 한 낯선 바닷가에 닿는다면 그곳의 이름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는가. 목포? 부산? 포항? 강릉?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밤을 새우고 새 햇빛을 만나고 처음 본 바닷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곳의 이름이 목포면 어떻고 포항이면 어떻고 청진이면 어떠한가. 그러나 소금 내음 속으로 물살 선선하게 번져가는 그 마을의 이름이 '여수'라면, 당신 한눈에 그 마을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 바닷가에 신발 두 쪽을 벗어두고 눈빛 맑은 그곳의 한 처자와 남은 세월을 아득바득 살아봄직하지 않겠는가. 별, 꽃, 바다, 꿈, 생선, 솥, 밥, 나무, 불, 물, 그물, 달빛……. 한 두 음절이면 족할 단어들의 서러운 눈빛과 함께. 숨어서 오래오래 적막하게."
- <곽재구의 포구 기행> 151쪽

   
▲ 여수 앞바다 ⓒ2004 김은주

 여수는 내게,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찬란하게 빛나던 내 20대의 어느 날이 그 곳에는 있고, 오동도를 맨발로 걸어 걸어 오르며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곳이고, 모가지째 툭 떨어져 내리는 동백 때문에 하염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 여수에, 다시 왔다.

여수의 새벽은 청량하다. 종착역에 내린 사람들은 바쁘게 갈 길을 가고, 나 역시 '소금 내음 속으로 물살 선선하게 번져가는' 곳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향일암으로 가 주세요. 지금 가도 해 뜨는 걸 볼 수 있겠지요?"

일출 시간까지 알아보고 왔으면서 괜히 걱정스러워 한 번 더 물었다. 아저씨는,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그 좋은 걸 보러 왜 혼자 왔느냐고. '그러게 말이에요'하고 나는 호기롭게 대답한다. 혼자가 더 편한데요 뭐, 그래 놓고는 내 입술은 제멋대로 바짝바짝 말라붙는다. 제기랄.

꼬불꼬불한 길을 30분쯤 달려서야 겨우 향일암 들어가는 길에 닿았다. 일찍 장사를 시작하는 식당 불빛에 의지해서 산길을 얼마쯤 올라갔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벌써 한 떼거리 몰려와 대웅전 앞마당을 시끄럽게 채우고 있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 거기 바다가, 잔잔하고 고요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온 바다를 완전히 자기 뜰로 삼아 버린 향일암에 나는 서 있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아기자기한 남해 섬들의 향연이, 낙산사 홍련암에서 내려다본 동해 파도의 장쾌함이 이 곳 향일암의 시원한 눈맛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굉장한 경관이다.

   
▲ ⓒ2004 김은주

 숨을 고르기 위해 대웅전 옆 계단에 잠시 앉았다. 제법 몰려왔던 사람들도 관음전 구경간다고 다들 올라가고 나 혼자다. 갑자기 등 뒤에서 누가 날 툭, 건드린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평소에 지은 죄가 많은지라 식은땀이 저절로 흐른다. 그래도 법당에 뭔 삿된 기운이 스밀 수야 있을라고? 오로지 그것 한 가지에만 의지해서 평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카메라를 꺼내서 필터를 갈아 끼우는데, 이번에는 내 앉은자리 오른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런! 동백꽃이다. 밤새 얼어 있다가 새벽이 되자 송이째 떨어져내리는 소리. 한 생을 살다 가는 소리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날 불러 자기 생의 마감을 돌아봐 주길 바랐던 것이라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치다 하시겠는가.

   
▲ ⓒ2004 김은주

 동백은 지고, 동박새는 저희들끼리 분주하게 해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6시 40분. 아침이 멀지 않은 시각이다. 바다 위에는 고기잡이에 나서는 배들이 물결을 가르고, 수평선은 서서히 해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야! 사람들 입에서는 저마다 탄성이 솟아오른다. 아예 바닥에 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결가부좌를 튼 그이의 뒷모습이 한없이 경건하다. 내가 누르는 셔터 소리가 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다.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의 일출을 보았으나, 내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모든 잠든 존재들을 불러 깨우는 일출이 두려움을 동반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대웅전에 들어가 몇 번이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먼 길 달려온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나이다, 잘 받고 가나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곱지 못한 마음으로 살고 있나이다, 어여삐 여기시어 마음밭이 다 마르기 전에 길을 찾게 해주소서….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화답하듯 투둑, 툭 동백을 떨구는 소리, 내 귀에만 화려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향일암 일출을 보았으니 더 이상 서둘 것이 없었다. 느작느작 걸어내려가 전망 좋은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시켜 허기를 채운다. 일출을 보고 한꺼번에 내려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갓김치를 파는 아낙들의 손놀림이 바빠지는 시각이다. 혼자 온 여행객이 별로 반갑잖다는 눈치를 팍팍 주는데도 꿋꿋하게 자리에 앉았다.

역시 남도의 맛. 된장찌개 뚝배기가 서울 여느 식당의 3인분 크기다. 푸짐하게 담겨 있는 온갖 해물 덕분에 이건 된장찌개가 아니라 해물탕에 가깝다. 작은 바닷가재 3마리를 깨끗이 발라 먹고, 꽃게 반 마리까지 아작을 내고서야 포만감에 피로와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따뜻한 바닥에 누워 딱 10분만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거워진 몸을 불끈 일으켜 오동도를 향했다.

   
▲ ⓒ2004 김은주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인 최영미는 동백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동도 가득히 떨어져 내린 동백 송이 송이들이, 차마 쉽게 졌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차라리, 지는 것보다는 잊는 것이 더 쉽더라 말해 버리고 싶어졌다. 뭐, 별 수 있으랴마는.

동백을 베고, 동백을 덮고, 동백을 뿌리면서 한참을 놀았다. 오동도에서 바라본 바다는 더없이 포근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따스하고 부드럽게 출렁이는 바다,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다가는 눈이 멀어 버릴까 두려워지는 그런….

 

동백은 지고, 봄은 온다. 봄은 오고, 동백은 간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구슬을 꿰고 계셨다. 손주 녀석 과자 사줄 돈은 생긴다며 곱게 웃는 할머니 때문에 내 가슴에는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는 곧 동백처럼 갈 것이고 그 손주는 나이가 들어갈 것이고,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게 왔다가 갈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절망에 차 있는 듯이 보일 때라도, 끝이 있고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믿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니, 나는 또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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