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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체 게바라 해방시인 김남주를 만나다
[박신의 아름다운 '반미' 읽기 1]
2004년 03월 08일 (월) 00:00:00 시민의신문 ngotimes@ngotimes.net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는 인간 생존의 엄혹한 진리 앞에 한 평생을 살다가 죽은 뒤 남게될 '묘비명'에 무엇이라 적을까? 한번쯤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름 석자 외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을 터이다. 그런 만큼 한 생을 압축해 표현할 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치열히 살아가는 게 힘들다는 것이겠지.
 

광주 망월동 한켠에 자리를 잡은 그의 묘비명만큼 아름답고 치열한 묘비명이 또 있을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시인의 영혼 여기 잠들다'
 

그가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광주란 지리적 역사성과 묘비명은 그가 살아온 가시밭길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함성지 사건-남민전 사건-췌장암으로 한창 나이에 죽은 시인 김남주, 그는 스스로를 '해방전사'라 불리길 원했고 자신이 쓴 시가 '혁명의 무기'로 사용되길 바랬던 진정한 혁명가였다. 
 
   
[김남주 평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빠르게 변화하는 세월에 밀려 잊고 사는 우리네 소시민들에게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해준다. 작가 장대석이 말하듯 <김남주 평전>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할 가장 순결했던 한 영혼의 기록이다.
 

전라남도 해남 땅에서 태어난 김남주는 머슴이었던 아버지와 지주의 외눈박이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새벽부터 농사를 지어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김남주의 아버지는 일제의 강제수탈과 지주들의 착취에 시름하던 민초였다. 그는 김남주가 면 서기, 군 서기, 더 높은 판검사가 되어 손에 흙을 뭍이지 않고 그동안 착취당했던 설움을 착취계급이 되어 풀고자 했던 소박한 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독재정권에 맞서 평생을 감옥에서 싸우던 중 "마지막으로 남주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적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시인 김남주는 학교생활보다는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과 민중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박정희 독재정권이 10월 유신으로 국회 해산, 정치활동 전면 중단, 진보인사를 살해하는 등 민주주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지하신문인 [함성]지를 제작해 갑오농민전쟁, 항일의병투쟁, 광주학생독립운동, 원산총파업투쟁, 4·19 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항쟁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독재정권 붕괴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함성지의 논조는 반일, 반미 논조를 유지했음은 당연하다. 결국 김남주는 [함성지]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혐의로 구속, 생전 처음 죽음 앞에 나신으로 선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권총을 꺼내더니 내 머리통에 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저주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김남주는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자신의 경험을 [진혼가]를 통해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데 가장 좋은 무기"라고 토로한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기꺼이 똥개라도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중략)"
 
 
이런 과정에도 박정희 독재정권의 폭압은 날로 극심해져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을 '법살'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해 남한사회를 겨울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전남 광주에서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함께 개설한 민중문화연구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다룬 프란츠 파농의 '세계를 뒤엎은 10일간' '스페인 내란' 등을 번역하며 후배들에게 '파리코뮨'을 강의하던 그는 강의를 듣던 학생의 밀고로 수배상태가 되어 서울로 도피한다.
 
이때 시인 김남주를 혁명시인으로 칭하게 만든 계기였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한다. 김남주는 남민전 전위조직인 '혜성대' 조직원으로 동아건설회장 최원석의 집을 터는 '땅벌1호 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결국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직전인 1979년 체포되었다. 당시 신향식 사형 집행, 안영구 등 5명 무기징역, 김남주 15년형을 선고받고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김남주는 감옥이라는 유배지에서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된다. 언론통제가 극심하던 당시 그의 시는 '총보다 펜이 강하다'는 고전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케 했다. 신군부세력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민중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내 누이의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면서도 언론통제를 통해 광주시민들을 '용공세력의 폭동'이라 매도당할 때 그의 시 [학살]은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피묻은 권좌와 이들의 배후에는 미제국주의가 있음을 폭로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감옥에 유배된 김남주는 감옥 벽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독재정권에 대한 칼날을 세워 자신을 단련시켰고 자본에 의한 착취, 미제국주의에 의한 민족분단과 자주성 훼손 등을 우리 민족역량을 통해 극복해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외침은 결국 80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었고 김남주는 감옥에 홀로 갇혀 있었지만 늘 시대의 중간에 민중들과 함께 호흡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국내외의 석방운동에 힘입어 1988년 12월 22일 형집행정지로 전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됐다. 유배된 지 만 9년 2개월 18일만이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랜 감옥생활에 건강이 심각하게 상해있던 그는 췌장암 판정을 받고 1994년 48세의 나이로 민중의 품으로 돌아갔다.
 

0.75평 독방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우유 곽에 못으로 쓴 시들이 암울했던 독재정권시절 한국 민주화운동에 불씨를 지피고 화력을 돋우게 했다. '너무나도 조국과 민중을 사랑해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 권력가와 자본가들을 너무도 미워했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의 세상을 끝장내고자' 했던 그의 삶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그의 흔적인 그의 아내 박광숙씨와 아들 '토일'에게조차 그의 염원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김남주의 아들 '토일'을 한문으로 표기하면 '金土日'이 된다. 노동하는 사람은 최소한 3일은 쉬어야 한다는 그의 열망이 담겨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투쟁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에도 부러움을 표시한다.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그에게 남민전 소식지 [민중의 소리] 제작과정에서 안면만 있던 한 여인이 '옥바라지를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여자, 결혼보다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이 최우선이었고 자신의 유배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편에서 미안함으로 옥바라지를 고사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시작된 옥바라지는 결국 김남주가 가석방 될 때까지 이어져 늦깎이 결혼을 치렀다. 김남주 개인에게는 옥바라지를 자처한 박광숙씨가 많은 힘이 되었을 터이다.
 
투철한 조직운동가였던 그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보이는 '기회주의' '나약함' '비관'과는 격이 달랐다. 그는 유배지에서조차 조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1. 김남주. 1985-
 

[김남주 평전]은 1부는 김남주 개인사를 통해 개인의 역사는 동시대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김남주 또한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시대소리에 바칠 수 밖에 없었던 변증법적 과정을 그리고 있다. 2부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삶의 궤적과 함께한 그의 시들을 통해 그가 그의 시속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상,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실천을 벌여온 철학적 고찰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미학은 '압축과 긴장'에 있다던 그의 철학은 온전히 그의 삶 속에 배여있다.
 
 
2004년에도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라고 외치던 한국의 체 게바라 해방시인 김남주를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조국을 사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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