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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에 경험한 가슴 떨리는 사랑
이보다 더 아프고,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2004년 03월 08일 (월)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 비 내리는 바닷가를 걷는 연인을 봤을 때 많이 부러웠다. ⓒ2004 박상규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처음 대학에 입학할 때 난 한 여자 동기에게 귀신에 홀린 듯이 홀딱 반해 버렸다. 그녀를 보기만 하면 심장이 거친 파도처럼 요동을 쳤고, 더 없이 활발했던 내 성격은 고양이와 마주친 쥐처럼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내 행동은 언제나 부자연스러워졌고, 평소 뻔뻔스러울 정도로 말을 잘하는 입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굳게 닫혀버려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난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실재로 별의별 일을 다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리포트 대신 써주기, 즉 쉬운 우리 말로 숙제 대신해주기였다. 난 컴퓨터가 있는 친구네 집에 찾아가 독수리 타법 축에도 들지 못하는 병아리 타법으로 밤을 꼴딱 새워가며 그녀를 위해 자판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때 친구는 옆에서 편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지만 난 부럽지 않았다.

새까만 산골 청년인 내가 사랑하는 새하얀 서울 처녀를 위해 사랑이 담긴 숙제를 대신해주는 데 잠이 올 리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자판을 치는 것도 좋았지만, 행복이 절정에 달한 순간은 바로 내가 밤을 지새워 작성한 리포트를 받아들고 수줍은 듯 살짝 미소짓는 그녀의 하얀 앞니를 볼 때였다. 그 '살인미소'는 지난 밤의 피로를 잊게 함은 물론, 아주 짧은 시간에 나를 '인간 리포트 제조기'로 만들어 버렸다.

난 정말 그녀가 좋았다. 마주치면 부끄럽고 가슴이 뛰어 제대로 얼굴 한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안 보면 답답해 환장할 것 같았다. 그녀 생각에 새카맣게 가슴을 태우며, 밤을 하얗게 보낸 그 수많은 날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애간장 녹이는 가슴 떨림. 난 그때의 사랑을 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해 늦은 가을, 새하얀 서울 처녀는 새까만 산골 청년의 '어설픈' 사랑을 받아줬고, 난 비로소 8개월간의 지난한 짝사랑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첫사랑은 깨지라고 존재한다 했던가. 수줍게 사랑했던 21살 우리들은 어리석은 욕심으로 각자의 마음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갔고, 끝내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며 돌아섰다.

8개월 간의 짝사랑을 무색하게 했던 5개월 간의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세월이었다.

그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낸 난, 변심한 여인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자못 진지하게 묻는 남자 영화 배우를 보며, 속으로 '바보, 그럼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툴툴거리는 처지가 되었다.

사랑의 실패는 사람을 성숙하게도 하지만, 대개 그런 성숙이란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즉 더 이상 낭만적인 사랑 따위는 믿지 않게 만드는 무딘 감성을 낳기도 한다. 그렇게 봄날이 가듯, 사랑도 가는 거다.

   
▲ 다정한 강아지 커플이 꽤 부러워 보일 때도 있었다. ⓒ2004 박상규

이후 난 몇 번의 사랑과 연애를 했지만 21살의 첫사랑만큼 가슴이 설레이거나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물론 사랑의 깊이와 농도가 부족한 건 아니었고, 다만 사랑의 느낌이 달라졌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 듯싶다.

첫사랑의 실패 이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상처의 주고받음을 최소한으로 하는, 효율이 극대화된 경제적 사랑의 방식을 마치 본능처럼 깨달았던 것이다. 사랑은 더 이상 힘들지 않고 편안했지만, 설렘이라든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알 수 있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감동은 느껴보지 못했다.

사랑의 제1법칙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있을 때 잘 해라'가 아닐까. 4년 전 이 절대적 가치를 잘 지키지 못한 난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26살 여름 이후 지금까지 정확히 3년 8개월 동안 애인 없이 살아왔다.

내 입은 "사랑해"라는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먹은 듯하고, 내 심장은 '언제 그렇게 심하게 떨려봤냐'는 듯이 너무나 질서 정연한 맥박을 유지해 왔다. 가끔 사람들에게, "연애 어떻게 하는 건지 다 까먹었다"라고 말하는데 허튼 소리만은 아니다.

늘어만 가는 생물학적 나이에 대한 부담감은 드디어 내 나이를 발음할 때, 특히 'ㄴ' 받침이 들어가기 시작한 서른살이 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러다 21살의 그때처럼 가슴 떨리는 사랑을 평생 재현해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조금씩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무감한 사랑이 아닌 가슴 설레고 심장이 가빠오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조금 아파도 좋으니 그 풋풋한 감정과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옅은 울림으로 전해져오는 대책 없는 사랑의 파장에 나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랬던 내가 얼마 전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고, 가슴 속에서 거짓말처럼 사랑의 파장이 우아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21살의 그때처럼 가슴이 심하게 떨렸고, 마음이 설레이는 그 옅은 흔들림에 시달리는 내 자신이 너무 좋고 행복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우습게도 난 친구들에게 가슴 떨리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자랑했고, 모두들 그 나이 먹고도 가슴이 떨리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짝사랑이었지만 무척이나 좋았다. 난 다시 누군가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새우기 시작했고, 그 사람 생각에 충만해지는 내 마음의 뿌듯함을 즐기게 되었다.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즐기는 사랑의 기쁨과 같은 감정이었고, 딸의 친구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열정이 살아난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케빈 스페이시)의 심정을 120% 이해했다.

난 날마다 그 사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작업이란 별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빠짐없이 샅샅이 읽는 거였다. 이유인 즉,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난 결근을 무릅쓰고 하룻밤을 꼴딱 새워 그녀의 단상을 적은 글 300여 개를 모두 독파했다. 정말 일찍이 없었던 집요함이자 끈질김 그 자체였는데, 지금까지 그 어떤 글도 그토록 집중력을 발휘하며 자세히 읽은 적은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난 1000개가 넘는 그녀의 게시판 글까지 1번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며칠 동안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이 스르륵 잠길 때까지 끈질기게 읽었다.

   
▲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는 딸의 친구를 사랑하면서 생의 열정이 되살아난다.

여기서 그쳤다면 내가 이런 글 쓰지도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무려 1000여 곡의 음악이 올라와 있는데 그 곡들도 1번부터 듣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좀 힘들었다. 음악이라고는 이은미의 노래보다 그녀의 맨발을 더 좋아하고, 김광석을 좋아하지만 그의 어눌한 말을 더 좋아하는 내게, 이름도 생소한 외국가수의 알 수 없는 음악을 주야장천 듣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난 듣고 또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즉 그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훗날 얼굴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이런 저런 음악을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을 하면 웬지 좋을 것 같다는 나의 순진한 발상이 나를 계속 생소한 음악 한가운데 있게 했다.

또한, 그녀가 아주 감동깊게 봤다는 영화 <헤드윅>. 난 사실 이 영화를 그녀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끝내주는 영화평을 써주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난 어렵게 DVD를 구했다. 그러나 그 영화는 내게 정말 재미없었다. 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영화를 끝까지 봤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정말이지 심혈을 기울인 역작 중의 역작이며 나만의 필승카드라 할 수 있는 영화평을 쓰고 그녀의 홈페이지에 올릴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난 소심했다. 우리는 서로 메신저를 등록해두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난 너무도 가슴이 떨려 바보처럼 말도 걸지 못했다. 이런 나를 다섯 명의 룸메이트는 "바보 같다"고 놀리며 "밑져야 본전인데 왜 그리 소심하냐"고 나무랐다. 얼마 전 난 정말이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신저에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 그녀가 너무도 상냥하게 말을 해왔다. 내 기분은 갑자기 좋아졌다. '필' 받아 긴장을 풀고 얼마 간의 즐거운 대화를 나눴는데, 갑자기 그녀가 하는 말, "상규씨, 요즘 저 기분이 너무 좋아요"였다. 혹시 나 때문에 좋은 건 아닐까 하는 나름의 욕망을 담은 전혀 가당치 않은 생각을 살짝 품으며 물었다.

"왜요?"
"저 요즘 좋은 사람이 생겼어요. 이런 걸 연애라고 하죠? 하하하."

오, 닭 쫓던 개가 지붕에 올라가 버린 닭을 바라보며 느꼈을 법한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란 말인가!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했는데, 시집가버린 갑순이를 바라보는 갑돌이의 감정이 이보다 더 아팠을까! 불로초를 끝내 구하지 못하고 생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진시황의 마음이 이보다 더 허망했을까!

  나는 많은 웃음이 나왔다. 다섯 룸메이트들도 배꼽잡고 웃었다. 글쎄, 어느새 내게도 '쿨'한 생활 방식이 생겼나보다. 난 내 안에 새로운 가능성과 열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장춘몽과도 같았던 서른살의 가슴 떨리는 사랑을 접었다.

사랑의 불씨는 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또 중국의 어느 혁명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작은 불씨가 광야를 불태운다고. 내 안에 작은 불씨만 남겨 두련다. 훗날 찬란히 불태우기 위해.

아,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그 영화평 파일은 내가 '삭제'키를 누를 때만 기다리고 있다. 아직까지 지우지 못한 이유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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