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손병관(patrick21) 기자     

[분석] DJ는 소신 접고 노 대통령은 버티는 이유 
 

민주당이 6일 탄핵소추안 시안을 마련하는 등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를 위한 실무적인 준비에 본격착수했다.

민주당은 노 대통령 탄핵사유로 ▲선거법 등의 위반으로 국법질서 문란 ▲자신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정상적인 국정수행 기반 상실 ▲총선올인 전략으로 국민경제 파탄 등을 들고 있다.

그간 한나라당과의 공조 등으로 인해 상당수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상태이지만,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조차도 작금의 '탄핵 추진'에 대해서는 '정체성 혼란'의 결정판으로 다가온다.

특히 4년전인 지난 2000년 총선 당시 여당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DJ)의 '민주당 지원사격' 사례를 감안할 때 민주당이 노 대통령에 대해 '탄핵 추진'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처럼 지난 2000년에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은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야당의 비판 정도가 '총선을 앞둔 정치공세'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번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노 대통령 탄핵 추진이 과연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된다.

노무현의 정치코드는 '2000년의 DJ' 승계

2000년 벽두의 화제는 시민단체들의 낙천, 낙선운동이었다. DJ는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발상이다. 4.19와 6.10 항쟁도 당시는 실정법을 저촉했지만 국민들의 의사로 정당성이 입증됐다(2000년 1월19일 오후 법무부 업무보고에 대한 답변)"며 시민단체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DJ는 이후에도 "시민단체의 요구는 국민의 뜻"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정치인 이외의 선거개입을 막는 나라가 없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DJ가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4·19와 6·10항쟁에 빗대는 등 법치주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며 "DJ는 국정을 택할 것인지, 선거를 택할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 더 이상 국정이 특정정파의 선거정략으로 농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2000년 1월23일 한나라당 당3역 기자회견) 이회창 총재는 나아가 공정선거 보장을 위한 DJ의 민주당 탈당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같은해 2월2일 신년기자회견)

올해 '낙천, 낙선운동'이 재개되자 노 대통령도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가 보다 더 확대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해줘야 된다. 합법 공간에서 하는 일들을 홍위병이네 뭐네 매도해서는 안 된다"며 DJ와 같은 입장을 드러냈다. (2월5일 강원지역 언론사 합동회견)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권의 시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지만, 당시 DJ를 편들었던 민주당이 한나라당 편에 가세해 노 대통령을 공격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새해 들어 계속된 노 대통령의 지방행사 참석도 야권으로부터 '총선용 기획행사'라는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다.

DJ 역시 2000년 총선 앞두고 잇달아 지역 방문

노 대통령은 지난 1월29일 대전에서 전국의 시.도지사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신국토 전략 선포식'을 가졌다. 이어 2월6일에는 구미에서 열린 '2백억달러 수출기념식'에 참석했고, 또 같은달 20일에는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로 내려갔다.

이런 노 대통령의 지역방문 행사를 두고 민주당은 "대통령이 바쁜 시.도지사들을 모아놓고 그런 행사를 할 때인가" "대통령의 노골적인 사전선거운동"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DJ 역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잇달아 지역을 방문했기 때문에 "왜 노 대통령만 문제삼느냐?"는 청와대의 항변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DJ는 당시 지방행사에서 '지역감정 타파'를 호소하며 총선에서의 야당 심판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발언을 자중한 노 대통령보다 한층 강한 정치색을 드러낸 셈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DJ는 2000년 대구에서 열린 '2.28 민주 의거 40주년 기념식'에서 "총선을 앞두고 큰 걱정을 갖고 있다. 지금 지역감정을 조장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도태돼야 한다"며 "(이번 총선에서) 여러분이 여당이건 야당이건 찍을 때 제발 당과 인물을 보고 찍되 지역으로 뽑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DJ는 다음날 3.1절 기념사에서도 "이번 선거를 계기로 해서 반드시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5.16 군사정부 이래 지역감정이 심화됐다"고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역감정의 득세로 인한 한나라당의 영남독식을 우려해서인지 3월13일 전직 대통령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는 "앞으로 본적지 표시를 호적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어떨지 검토해 볼 일"이라는 말까지 했다.

지역주의 선거를 우려한 DJ 발언에 대해 "87년 대선 때 DJ가 '4자필승론'을 들고 나와 지역주의가 심화됐다"(이회창 총재) "지역감정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DJ"(박근혜 부총재)라는 한나라당의 반박이 나왔지만, '대통령의 지역방문 = 관권선거'라는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통령 지역방문 = 관권선거'로 바로 이어지진 않아

DJ는 '3.15 의거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산에 내려가서는 "마산시민이 국민대화합의 큰길을 여는 데 선봉에 서달라"고 완곡한 정치어법을 구사했다.

DJ는 대신 "정부는 14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3·15 성역화사업을 추진해왔다"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인 마산항 개발을 위해 벨기에로부터 2100억원의 투자약속을 받아냈다" "거가대교 건설과 마산항 횡단보도 건설을 위해 프랑스가 각각 9000억원과 2000억원을 투자한다"는 선심성 발언을 쏟아냈지만, 야권이나 언론은 이 같은 발언들을 문제삼지 않았다.

2004년 탄핵공세의 빌미가 된 것은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주기 바란다"는 노 대통령의 2월24일 방송기자클럽 발언. 그러나 DJ 역시 2000년 2월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어느 정도의 의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남은 3년간 내가 일하는 데 괜찮겠다 싶은 정도만 되면 좋다. 나는 그 이상 욕심 안 부린다"는 답변으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의 발언은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자회견 중 질문이 나오자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DJ는 노 대통령처럼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탄핵 위기에 봉착하지는 않았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행한 DJ의 정치적 발언 사례는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해 1월31일에는 "이번 16대 총선에 국운이 걸렸다"고 말했고, 3월14일에는 "이번 총선은 남은 임기 3년의 국정안정과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하는 중요한 선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심지어 3월19일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을 독대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해야만 경제도약을 이루고 중산층과 서민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DJ-이인제 회동은 '여당 총재와 선대위원장의 만남'이라는 성격이 짙었지만, 한나라당은 즉시 '관권선거 음모'라고 시비를 걸었다.

DJ, 불합리 지적하면서도 실정법 지켜

홍사덕 한나라당 선대위원장은 "DJ가 국무회의에서 여당옹호 광고를 내도록 지시한 것은 국민 혈세로 여당을 도우려는 불법선거운동"이라며 "미국 같으면 탄핵소추감"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에 더해 이회창 총재는 "DJ가 선거에 개입하고 관권, 혼탁선거가 계속 이어지면 선거후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 움직임이 있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의 하야론은 YS까지 가세해 큰 파문이 일기도 했지만, DJ의 직접 해명으로 인해 논란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DJ는 3월21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선거법상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돼 있지만 나는 여당의 총재로서 당의 업무는 관여하고 관장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이자 여당의 총재로서 법에 따라 그 책무와 의무를 구분해서 할 것"이라고 직접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DJ가 이 대목에서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다 허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안 돼 있기 때문에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고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그러나 법이 잘못 돼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덧붙인 것은 지금의 정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병완 홍보수석 등 청와대 참모들은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노 대통령을 옹호하고 있지만,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여론은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팽팽한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탄핵안 추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 작년 10월 재신임 선언 직후처럼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야권이 힘의 논리로 대통령 탄핵을 관철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거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법을 지키겠다고 소신을 접은 DJ와 같은 해법을 노 대통령이 택할지는 알 수 없다.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의사표명은 당연하다"고 주장해온 노 대통령은 민주당이 '사과 시한'으로 정한 7일에도 침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