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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 편의 영화
멜 깁슨 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미국 개봉현장
2004년 03월 02일 (화)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오마이뉴스: 강인규 기자

   
▲ ⓒ2004 ICON

'사순절'은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다. 이번 주 수요일에 시작된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40여 일 간 계속된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데 일부 종파에서는 사제들이 신도들의 머리 위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상기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여기서 재는 죽음의 상징으로 교인들은 이 의식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되새기는 동시에 2000년 전 예수가 세상에 와서 받았던 고난에 참여한다.

적어도 미국인들에게 금년 '재의 수요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념에 근거해 세운 나라인 미국은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현재 집권하고 있는 대통령은 자칭 종교적으로 '거듭 난 자'다. 이처럼 종교적인 사회인 미국이 최근 종교 논쟁으로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연일 특집 방송과 기사를 내보냈으며 각 종교단체에서는 유인물을 뿌리거나 이메일을 통해 열심히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이 논쟁의 중심에 선 것은 다른 아닌 영화 한 편이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비판해 오던 '상업문화의 온상'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인물이 만든 영화다.

   
▲ 한 유대인 단체에서 배포한 영화관련 유인물 ⓒ2004 Jews for J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몇 시간을 담은 이 영화는 제작 초기부터 '반유대주의' 논쟁에 불을 당겼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제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영화의 대본을 내놓으라고 말하며 감독인 멜 깁슨을 찾아갔으며 이에 대해 기독교 단체에서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 뿐인데 이를 억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멜 깁슨은 자신의 영화가 결코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완성되지도 않은 필름을 가지고 종교지도자와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몇 차례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이를 참관한 종교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어떤 이는 "영화 내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멜 깁슨이야말로 현대의 미켈란젤로다"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고, 다른 이는 "내가 본 영화중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영화였다"하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영화를 둘러싼 논쟁, 매진으로 이어져

이로부터 다시 수십 차례에 걸친 '특집보도'와 멜 깁슨을 초대한 토크쇼가 있었고 다시 몇 차례에 걸쳐 종교단체의 항의와 재반박이 이어졌다. 이런 논란 끝에 드디어 '재의 수요일'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양보 없이 전개되던 반유대주의 논쟁과는 별개로,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도리어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를 현격히 늘려놓았을 뿐이다.

그 결과 오전 상영이 드문 미국 극장에서조차 아침부터 찾아와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각 방송사에서는 첫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극장 앞에 중계차를 배치했으며, 사람들은 팝콘과 콜라 대신 경건한 침묵으로 하나 둘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독실한 전통주의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은 오래 전부터 이 영화를 계획해 왔으나 이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흥행을 보장받을 수 없는 종교영화에 대해서 어떤 제작자도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으며 영어 대신 이미 사어가 된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만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멜 깁슨의 제안에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 ⓒ2004 ICON

멜 깁슨의 고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업영화의 흥행사로 미국 관객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깁슨이 "영화에 단 한 마디의 영어자막도 넣지 않겠다"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이다.

자막이 들어간 외국영화 자체를 싫어하는 미국 관객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언어를 이해할 아무런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결국 멜 깁슨의 이름은 크레딧 화면을 여러 번 장식해야 했다. 각본 멜 깁슨, 감독 멜 깁슨, 그리고 제작 멜 깁슨. 그는 사재를 털어 제작비 2500만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개봉 첫 날 올린 수익은 감독 자신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수요일 하루만 2000만불 이상을 벌어들이는 이변을 낳았기 때문이다.

<패션¨>이 개봉이후 5일간 벌어들인 총 수익은 1억 2천 4백만둘로, 하루평균 입장수입이 제작비를 상회하는 놀아운 액수다. 이 성적은 <스파이더맨>이나 <반지의 제왕> 등 다른 대형 상업영화가 세운 기록에 필적한 만한 것은 아니지만, <왕중 왕>이나 <십계> 등 다른 종교영화의 총개봉일 수익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러나 개봉 전까지 깁슨과 그의 영화는 적지 않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깁슨은 일부 장면을 편집했으며 자막을 넣어달라는 관객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 ⓒ2004 ICON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어떤 영화인가?

흔히 '열정'으로 번역되는 '패션'(passion)은 기독교에서는 '수난'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영화에 더 없이 적절한 제목이다.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사형되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화면에 옮긴 영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경의 신약부분에 쓰인 그리스도의 최후를 고통스러우리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살점이 뜯어져 나가는 채찍질, 석회암 바닥에 흥건히 괸 피, 예수의 위태로운 어깨에 걸려 언덕을 오르는 육중한 십자가, 그의 손과 발에 차례차례 박히는 거대한 못과 망치소리.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 정서'의 불을 당길 것을 우려했던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멜 깁슨이 표현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주관적 해석을 지양하고 성경 내용을 충실히 시각화하겠다는 감독의 의도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영화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영화는 시종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배제하고, 사건을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묘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어 대신 아람어와 라틴어를 고집한 것 역시 '객관성'에 대한 감독의 집착을 보여준다.

   
▲ ⓒ2004 ICON

이 때문에 영화비평 시각에서 보면 <패션…>은 대단히 건조한 작품이다. 성경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구성은 사건을 시간진행순서대로 쫓아가는 연대기적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표현을 배제하려다 보니 예수의 육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고난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패션…>은 형식적으로 보수적이고 시각적으로는 잔혹한 영화가 될 수밖에 없던 셈이다. '반유대주의'의 논란에 맞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영상에 담으려는 노력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두는 결과로 나타났고 예수의 고난을 사실적으로 영화화한 결과는 다시 역으로 ‘반유대주의’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역설을 초래했다.

<패션…>이 표현에 조심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시종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을 답습한 '모큐멘터리(mocumentary)' 차원에 머문 것은 아니다. 영화는 잦지는 않지만 사건의 순간마다 등장인물의 연관된 회상장면을 삽입했으며 드물지만 예수가 뱀의 머리를 밟는 것과 같은 상징적 표현도 포함했다.

   
▲ ⓒ2004 ICON

영화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조연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제임스 캐비즐 분)나 성모 마리아(마이아 모겐스턴 분)의 성격에 대해서는 주관적 해석이 철저히 배제된 반면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도 유대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예수를 사형에 처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의 일로 고뇌하는 사려 깊은 인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유대교 대제사장 가야바는 소심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는 비판이 유대교측에서 나올 법하다.

잔인한 장면에 담긴 구원과 화해의 메시지

오랜 세월동안 '예수 살인범'이라는 비난을 받아 온 사람들이기에 이 영화를 둘러싼 유대인들의 우려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패션…>이 대체로 균형잡힌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반유대주의의 음모로 보는 시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자비의 물 잔을 건넨 사람들도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잔인한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패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과 화해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의 이야기다. 병사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 제자인 베드로가 칼을 꺼내어 한 병사의 귀를 자르자 예수는 귀를 집어 다시 병사에게 붙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 ⓒ2004 ICON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군중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예수는 가해자들을 원망하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 후 인류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이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돈과 명예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 소리에 묻혀 버렸다.

2000년 전 예수를 누가 죽였느냐는 물음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조롱하고 그의 손에 못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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