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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 향기 배인 물 마시고 가라고...”
[걷고 싶은 길을 찾아] 송광사 굴목이재
2004년 03월 02일 (화)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 새들이 향기 배인 물을 마시고 가라고 꽃잎을 띄우는 스님의 마음. 불일암 헌식대 ⓒ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 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따뜻한 슬픔 / 홍성란

수요일 오후 1시 50분 서울발 여수행 열차에 오른다.

다시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배낭 속에는 카메라와 책 한 권, 머릿속에는 지난 일요일 달리는 차에서 선배의 이빨과 부딪혀 생긴 혹 하나. 창 밖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벼를 베어 낸 빈 들판은 여인의 속살처럼 창백하다.

순천에 내려 송광사행 막차에 올라타니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깊이 내려앉았다. 송광사 입구에 내리니 매표소에서 단속을 한다. 스님과 약속했느냐 묻는데 아는 스님 한 분 없는 처지에 약속이 있을 리 없다. 지금 시간에는 약속 없이 못 들어간다며 아저씨는 완강하다.

원주스님이 안 된다고 하면 도로 내려오겠다고 몇 번을 설득한 후에야 경내로 들어선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까지 가는 길에는 깊고 촘촘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어둠과 침묵만 무성하다.

냉정하고 낯선 밤의 표정에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나.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하다.


▲ 물 위에 비친 단풍 든 나무들 ⓒ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송광사 경내에 들어서니 9시가 다 됐다. 종무소를 찾아가니 원주스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방을 주시고 공양했는가만 물으신다. 방으로 들어가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던 세 명의 보살님들이 인사를 건넨다.

서둘러 씻고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불이 꺼진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려면 일찍 자야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국토 종단할 때 이곳에서 하룻밤을 쉬어갔다. 그때 내게 “초발심 잊지 마소”라며 과일 한 보따리를 싸주던 손 큰 행자는 지금쯤 계를 받았을까.

새벽 3시.

정적을 깨뜨리며 목탁과 염불 소리가 퍼진다.

지난 밤 내내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어느덧 새벽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옷을 차려 입고 대웅전으로 간다. 실상사에서 성지순례를 왔다는 한 무리의 신도들이 이미 정좌해 있다.

그동안 새벽예불을 본 적은 몇 번 있으나 예불을 드리기는 처음이다. 곁눈질을 하며 절을 하고, 경을 낭송할 땐 그저 눈을 감고 듣기만 하고…. 죽비 소리와 함께 예불이 끝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서니 다리가 저려 다시 주저앉고 만다.

방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6시에 깨어 아침 공양을 하고, 같은 방 보살님을 따라가 혜전 스님과 차를 마신다. 베푸는 마음만으로 이미 지극한 복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온다.

아홉 시쯤 굴목이재를 넘어 선암사로 향하는 길에 오른다.

배낭을 챙겨 나서는 내게 한 방을 쓰는 동갑내기 아가씨가 어디 가는 길이냐고 말을 건넨다. 선암사로 넘어갔다 올 거라고 했더니 동행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혼자서 걷고 싶었기에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하지만 어차피 같은 길 위에서도 결국 혼자 걷는 법이니 굳이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아 그러자고 한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서늘하다.

잎을 떨군 숲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좁은 오솔길을 걷는 내내 계곡은 보이지 않지만 물소리는 가까이 따라온다. 한 시간 남짓 걸어 송광 굴목이재에 도착해 의자에 앉아 쉰다.

잡목숲을 스치는 이 기막힌 바람소리.

할 수만 있다면 두레박 가득 이 바람소리를 찰랑찰랑 넘치게 담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누군가의 귓가에 부어주고 싶다.

함께 걷는 그녀가 말한다.

“풍경은 담을 수 있지만 소리와 향기는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아쉬워요.”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게 어찌 소리와 향기뿐일까. 어깨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햇살의 감촉도 담을 수 없고,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며 깨어나는 내 생생한 감각도 담을 수가 없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담고자 하는, 남길 수 없는 것들을 남기고자 하는 처절한 노력의 흔적이 결국 사진일까.


▲ 광운암 가는 길에 내려다보는 송광사 경내 ⓒ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인적 없는 길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우리는 재 가운데에 있는 보리밥집에 도착한다. 나물과 된장을 비벼서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숭늉까지 한 그릇 마시고 다시 걷는다.

큰굴목이재를 넘으니 선암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인다. 선암사 근처의 편백나무 숲에 누워 쭉 뻗은 나무를 감상한다.

그녀는 “나무랑 호흡하고 가요”라며 커다란 편백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귀를 가져다 댄다. 나 역시 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잠시 기댄다.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 나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사철 푸른 바늘잎 나무 말고 넓은잎 나무로.

맨 몸으로 혹한의 겨울을 견디어낸 후 어리고 여린 새 잎을 가장 먼저 내밀어 봄을 알리고, 여름 내 무성하게 그늘을 드리우다가 가을이 오면 다시 잎을 떨구고 겸손하게 겨울을 준비하는 그런 나무로.

선암사에 들어서니 경내에는 때아닌 동백과 철쭉이 낭자하다.
그래서인가, 마치 꽃 핀 봄날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다리로 꼽히는 선암사의 승선교는 공사중이라 칸막이를 치고 막아놓았다. 한바퀴 돌아 절을 둘러본 후 버스를 타고 승주읍으로 나온다.

다시 차를 갈아타고 송광사에 들어오니 저녁예불을 드릴 시간이다. 불자도 아닌 내가 때마다 예불을 드리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지만 나는 늘 예불을 드리는 마음과 그 장중한 분위기 자체를 즐겨왔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슬람 사원에서도, 카톨릭 성당에서도, 그리고 산중의 절간에서도 미사를 드리고 예불을 올리는 다신교 추종자 같은 생활을 몇 년째 해오고 있다.

오늘 저녁 염불소리는 그레고리안 성가보다 더 맑고 장엄하게 들려온다.

▲ 불일암. 법정 스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유명한 나무 의자가 앞에 놓여 있다.ⓒ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저녁 예불 후에 인법 스님과 차를 태운다.

같은 방에 머무는 보살님이 스님의 어머니라 함께 차를 마시는 인연을 엮게 되었다. 스님은 어머니를 보살님이라 부르고, 어머니는 아들을 스님이라 부른다.

아들을 아들이라 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의 “형제를 형제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던‘ 홍길동의 비애가 생각난다.

홍길동과 다르다면 스님의 경우는 부모자식의 연을 스스로 끊었다는 것이겠지. 자식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묻고 싶은 것도 다 묻지 못하고, 말과 행동을 아끼는 어머니의 마음이 애쓰지 않아도 보여 나는 또 괜히 눈이 맵다.

스님 말씀 중에 “해탈하면 재밌으니까 해탈하려고 하죠”라는 말씀이 새롭다.

모든 번뇌와 일체의 사념이 끊어진 해탈의 경지는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느끼지 않는 무감정의 경지가 아니라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뜻일까.

새벽 3시. 다시 목탁소리에 눈을 뜬다.

어제보다는 조금 익숙한 자세로 예불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 한 줄로 서서 장삼 자락을 끌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스님들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대웅전 마당에 기대서서 오래 오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 공양도 거른 채 7시 반까지 잤다.
밖으로 나오니 밀짚모자를 쓴 인법 스님이 이미 기다리고 계신다. 스님의 안내로 송광사 경내를 돌아본다.

너무도 아름다운 대숲과 편백나무 숲길을 지나 그림 속 풍경처럼 깔끔한 불일암을 돌아본다. 법정 스님이 기거하셨다는 불일암은 화장실과 마당의 수돗가, 우물이 있는 세면장까지 어디 하나 손 댈 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하다. 너무 맑고 청정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다.

새들과 산짐승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불일암 헌식대에서 인법 스님이 꽃잎 몇 장을 돌확 위에 띄운다.

궁금한 듯 바라보는 내게 쑥스러운 표정으로 스님이 말씀하신다.

“새들 향기 배인 물 마시고 가라고….”

스님의 그 고운 마음이 내 마음에 사무친다.

▲ 선암사 편백나무 숲 .ⓒ 오마이뉴스 김남희 기자

 점심 공양을 한 후 다시 스님과 선암사 가는 길목으로 들어선다.

하얀 고무신 차림의 스님은 자갈길, 언덕길을 아무렇지 않게 오른다. 산길은 고무신 신고 다니기가 편한데 도시의 아스팔트길이 오히려 더 불편하다며 “고무신도 속세에 나가면 기를 잃고 힘을 못 쓰더라구요”라며 웃으신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 스님들이 여름이면 목욕을 즐긴다는 작은 폭포와 소를 보여주신다. 한 여름 무더위를 선풍기도 없이 견디는 스님들이 더위에 지칠 때면 이 작은 소에서 물안경 쓰고 헤엄도 치고, 멱도 감으면서 아이들처럼 논다고 한다.

이곳 절에서 일하는 여자 보살들이 스님들이 멱 감는 이 폭포를 찾기 위해 몇 년째 숲을 기웃거린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들려준다.

숲에서 내려와 스님께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긴다. 부엌에서 행자님들을 도와 새알을 빚은 후 절을 나선다.

이곳에 머무르는 사흘 간 내 마음은 몹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제 돌아갈 속세에서의 팍팍한 삶도 이곳에서 얻은 고요로움으로 한 세월 버티어 낼 수 있기를…. 

▒ 김남희 기자는 혼자 길 떠나기를 즐겨하나,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 무심하지 못하며,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붙잡고 30년째 '버벅대는' 생활을 해왔다. 그러다 드디어 직장일마저 접고 5년 예정으로 세계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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