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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는가
차갑지 않고 따뜻한 영화 <콜드 마운틴>
2004년 02월 27일 (금)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오마이뉴스: 김규종기자

영화 <콜드 마운틴>은 느릿느릿하다.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로 1996년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석권했던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유장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으로 전쟁과 사랑의 주제를 더러는 묵직하게, 더러는 가슴 뭉클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빠르고 현란한 장면전환, 등장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자극적인 무한폭력 등과는 거리가 멀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아버지를 따라 노스캐롤라이나의 '콜드 마운틴'에 도착한 아이다는 순박하고 말수 없는 청년 인만을 만난다. 여느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그들은 서로에게 격정적으로 끌리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당대의 남부지역에 고유한 보수적인 성향도 작용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자신의 이름도 약어로 말할 정도로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인만은 아이다를 향한 속내를 좀처럼 털어놓지 못한다. 반면에 적극적인 성격의 아이다는 그에 대한 호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그가 들판을 갈아엎는 동안 달리는 마차 위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이다의 모습은 모자를 벗어들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는 인만의 표정과 잘 대비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사랑은 없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발발한 남북전쟁의 소용돌이가 마침내 이곳 콜드 마운틴까지 밀려 닥친다. "전쟁은 모든 쓸모 있는 남자들을 데려가고, 여자들만 세상에 남긴다"고 했던가! 철없는 풋내기들과 젊은이들은 전쟁이 불러오는 야릇한 쾌감, 혹은 영웅성의 발현 가능성으로 한없이 들뜨고 이제 그들은 작별하여야 한다.

<미라보 다리>를 쓴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조차 제1차 세계대전에 내재된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살육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병사한 시인 바이런은 이런 낭만적인 전형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은 세상의 젊은 영혼들을 바닥 모를 심연의 나락으로 인도하거나, 끝 모를 창공으로 데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인만의 흉중은 어떠했을까?

아이다가 "나는 당신을 몰라요"라고 말했을 때 인만이 그녀에게 던지는 대사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말이 오가야만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나요? 서로에 대한 느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밤새 누군가를 그리느라 아침에 일어나 가슴 저리면 그 기분을 말로 어떻게 표현하죠?"

문명과 교육, 훈련된 감성의 소유자 아이다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 그대로 성장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인만 사이의 거리는 이 지점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언어로 드러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예민하게 떨리는 감정과 심리상태를 그저 느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만은 자연과 합일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콜드 마운틴>은 '전쟁과 사랑'이라는 매우 오래 되고 낡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도 일반화된 틀 속에서 서사를 진행한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참상과 그것이 야기하는 인간성의 황폐화 및 상실을 고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시에도 대면할 수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를 그림 같은 영상과 감미로운 음악으로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아주 오래된 영화 <전쟁과 평화>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콜드 마운틴>은 정형화된 영화문법을 지키고 있지만, 나름의 신선하고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아주 괜찮은 영화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인만의 대사처럼 말보다 '느낌'을 강조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내면적인 교감을 추구한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조차 지극히 아낌으로써 언어가 아닌 영혼과 심성을 통한 완전한 상호이해와 사랑에 도달한다.

4년 넘게 진행된 전쟁의 시간대 속에서 '기다리는' 인물과 '돌아가고자' 하는 인물 사이의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양방향의 성격을 지니는 편지글의 서사형식은 관객들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의 형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제시한다.

<콜드 마운틴>의 또 다른 매력은 전장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장면이나, 여타의 몸서리나는 장면들을 매우 절도 있게 처리함으로써 인간적인 예의에 끝까지 충실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남북전쟁의 실상과 전개양상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시기에도 아름답게 꽃필 수 있는 인간과 연인관계의 설정과 진척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영화 <콜드 마운틴>은 한 장의 사진을 기막힌 소품으로 활용한다. 인만이 사경을 헤맬 때, 존재의 본원적인 의미를 상실하려는 시점에 그 사진은 언제나 그를 밝은 빛의 세계로 데려간다. 천리가 넘는 머나먼 길을 걸어서 귀환하는 인만의 귓전에 메아리치는 아이다의 목소리는 얼마나 절절한가.

"만일 지금 당신이 싸우고 있다면, 싸움을 멈추세요. 만일 지금 당신이 행군하고 있다면, 행군을 멈추세요. 그리고 저에게로 돌아오세요."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콜드 마운틴>은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당신에게 돌아왔어"라는 말을 위하여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인만의 내면은 매번 그 명제에 함몰됨으로써 보다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인물이 될 가능성을 상실한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앳된 여성에게 인만이 보여주는 면모는 문자 그대로 오래 된 19세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물 아이다에 비하여 인만의 성격은 고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매일 죽음의 문턱에 도달함으로써, 극단적인 상황전개의 과정에서도 굴곡이 없는 인만의 인물설정에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콜드 마운틴>은 전쟁과 사랑의 지극히 배타적인 대립항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종국적인 목표는 대물림을 통하여 인간존재의 의미를 깊이 천착하고, 역사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콜드 마운틴>은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시끄럽게 싸우지도 않으며, 도덕군자처럼 설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잔잔하고 느릿한 어조로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는가?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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